훤칠한 키에 약간은 슬픈 분위기가 풍기는 모습이었습니다. 작가 특강에서 만난 저자는. 강연이 시작되자 유쾌하고 위트 있게 좌중을 압도했지요.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광고일과 패션 일을 했고, 아이돌과 사업도 했다고 했습니다. 빈틈없이 시간을 관리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행자로 삶의 쉼표를 찍으며 견디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쉼표들은 책들로 온전히 남았고, 대중들로부터 인정도 받았지요. 여행작가이지만 스스로를 오래도록 여행자라고 표현합니다. 저서로는 <함부로 사랑하고 수시로 떠나라>, <나조차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같은 시간에 우리 어쩌면>등이 있어요.
계획하지 않았던 몸의 아픔으로 일 년간의 시골 살이가 책에 실려 있습니다. 책은 자연스럽게 계절의 흐름을 따라 봄과 여름, 가을, 겨울, 또다시 봄으로 이어져요. 시간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경험도 해보고, 자신을 낮춰 집을 쓸고 닦으면서 자신을 돌봅니다. 자신을 잘 돌보는 방법으로 매번 새로운 재료들로 새롭게 요리도 하고, 처음 만난 집에 이름도 붙어 줍니다. 사람에 어울리는 집이 아니라 집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면서요. 작가의 눈에 비친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지듯이 선명합니다. 그와 함께 걷는 길이 낯설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가면 인심 좋게 웃어주는 그를 만날 것도 같아요. 동네에서 가장 젊은 나이로 주위의 어르신들을 선생님처럼 모시며 산책을 하고 안부를 챙깁니다. 그들과의 일상이 나른한 오후의 햇살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하죠. 만약 한 계절만 고른다면 어떤 계절을 고르고 싶나요? 타닥타닥 마디를 부러뜨리며 타들어가는 봄밤인가요? 바늘처럼 예리한 더위가 촘촘히 내리꽂히는 여름인가요? 갈대 깃에 내려앉은 가을볕인가요? 거친 바람 소리에 깨어 삶을 자책하는 겨울인가요?
그대가 앉은 자리를 잘 쓸고 닦으며 보살피시라. 아무것도 없는 이 시골 산중보앉은 그 자리다, 그대가 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자라니 이곳보다 낫지 않겠나. 그대가 그대의 자리에서 가장 빛이 날 때 이곳에 오시라. (P90) 정말 그럴까 생각하다가 의심 없이 믿기로 합니다. 더 좋아질 거라고 믿으면서 밀양으로 내려왔던 저자가 실제로 좋아졌던 것처럼. 그의 말을 믿기로 합니다. 내가 앉은 자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자리라고. 사랑이 옅은 바탕색이 되어 존재감을 잃어가는 것이 결혼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분명 사랑했고,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전부가 되지 않고 바탕이 되는 것. 모든 것의 바탕이 되어 바탕 위에 삶을 하나씩 쌓아 올리는 것이 결혼생활이지 않을까요? 결혼하고도 상대를 향해 계속 심장이 두근대면 심장 마비로 죽는다는 우스갯소리처럼 밋밋한 사랑에 익숙해져가는 것이 생활이며, 일상이고, 내가 앉은 자리입니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저자의 말을 잘 들어 보기로 합니다. 오래 묵혀두었던 먼지를 쓸어 내듯 내 마음도 쓸고 닦습니다. 희미한 바탕색이 조금은 더 잘 보이도록.
앙상한 가지 사이로 관통하는 태양의 온도를 만지는 일로 다가오는 계절을 견디고 살자.(P193) 겨울에는 꽃이 없어도 앙상한 가지 사이를 관통하는 태양의 온도를 만지는 일로 견딜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겨울의 흰 눈은 나오지 않지만,(그가 있을 때 눈이 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요) 충분히 겨울이 느껴집니다. 무심히 흔들리는 바람 소리에 잠을 설치는 새벽, 쨍한 추위에 코끝이 시려오는 아침, 그 아침을 음계를 집듯 산을 밝히는 일출. 생각보다 겨울도 아름다운 것이 많습니다. 그의 말처럼 이쪽이든 저쪽이든 스스로 아름다울 수 있다면 어디든 꽃자리이니까요. 겨울날 태양의 온도는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분명 추운데 따뜻하고, 따뜻하면서 포근한 느낌이 드니까요. 그 햇살 한 줌으로도 겨울을 견딜 수 있다니. 어디서나 그는 아름다울 자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있는 그곳에서 한 줌의 햇살을 발견하시길. 그래서 어디에서나 스스로 아름다워 지시 길. 그대도 나도. 아름다운 것들만 눈에 담기에도 부족한 삶이니까요.
책을 읽고 나자 왠지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라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무심히 보내던 문자에도 마음을 담아 보려 단어를 고르는 내가 보여요. 구름을 뚫고 비치는 햇살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말없이 슬쩍 다가가 팔짱을 끼고 함께 걸어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서로의 속도 맞추며 걷고 싶습니다. 많은 말들은 살랑이는 바람에 실어 보내고, 당신과 나는 조용히 걸을 겁니다. 함께 걷는 당신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좋아질 겁니다. 더 아름다워지고,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더 좋아질 거예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석양이 지는 초여름의 저녁을 걷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외롭지만 따뜻하고,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분주히 삶의 자리를 쓸고 닦는 당신에게 슬쩍 팔짱을 끼듯 전합니다. “우리 함께 걸어요. 같은 곳을 보면서 오래오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