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정원. 공연 예술학을 전공한 저자가 프랑스에서 6년을,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2년을 보내며 가졌던 생각을 담은 책. 장르를 말하자면 에세이. 내게는 참 뜬금없을 책. 그럼에도 한 편의 소제목을 마칠 때면 어김없이 저자의 얼굴이 궁금했던 날들. 마지막 장을 덮고도 앞표지의 ‘목정원’이란 이름에 한참 시선을 두었던 오늘도.
내용이야 공연과 예술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내게 큰 의미는 없었을 것들. 다만 소소한 일상을 보는 시선과 예술의 내면에 들어가는 깊이는 기실, 예술업을 하는 자의 깊은 사색이 남다름에 그려려니 하고도.
명품. 언젠가 지방 촌 가족이 서울 구경이랍시고 찾았던 내로라호텔. 그 스파뭐시기 샤워장에서 명품 빤스 입은 아저씨를 본 기억. 참 별것에도 다 명품 이름을 새겼는가, 우스웠던 그 날의 기억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든 생각이라면 이 또한 참 엉뚱하지만, 책에도 문장에도 명품이 있다면 이 책, 이 문장이지 않을까.
수려한 문장을 따라 필사도, 읽은 후기도 적어본 오늘. 저자가 더욱 궁금했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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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을 쓸 때 여러 번 다시 보는 걸 최대한 지양한다.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다 읽었을 때의 감상과 글을 쓸 때 발췌하며 읽을 때 감상이 달라지는 게 되고, 결과적으로 글을 쓸 때의 감상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글에서 발췌할 법한 문장을 표시해두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다음에 책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그 부분만 읽어 놓고 다시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 게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나의 감상문은 쉬운 편일 것이다. 아마추어의 시각에서 바라보기에 깊이나 전문성을 기대할 수 없고, 비판의 칼날을 예리하게 갈아서 내게 들이댈 반론도 맞닥뜨릴 필요가 없을 것이기에. 그럼에도 완결된 감상문에서 원하는 바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낀다.
이 서문 덕분에 공연 예술에 큰 관심이 없었음에도 책을 읽을 결심이 들었다. 감상에 대한 글을 작성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공감받는 경험을 공감받으면서 시작하다 보니 이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졌던 까닭이었다. 이 책은 작가가 프랑스에 유학을 가서 자신이 겪고 경험한 공연 예술을 다룬다. 주로 다뤄지는 공연 예술은 무용과 연극인데, 이 둘의 공통점은 언제나 관객들에 실황으로 보이는 예술이라 100% 반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같은 동작이라고 할 지라도 다른 시간대의 예술에서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특성 차이나 타이밍, 신체 상태 등의 차이로 온전히 모방하지 못하고 미세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나 TV 드라마 같은 예술이 편집을 통해서 오류를 수정하고 최선의 판본을 복제하며 보여줄 수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책은 이런 식으로 무용, 연극에 대해 작가가 겪어냈던 각각의 경험들을 토막글로 써서 엮었다. 작가가 쓴 글에서 공통적으로 예술의 마멸에 대한 감상이 느껴졌다. 첫 챕터에서부터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소리와 공간이라는 부분은 시연자와 감상자의 비유로 보인다. 실제로 치환하여 말하더라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이 시연자의 몸에서 출발한 몸짓이나 말들이 감상자에게 도달하고, 그 도달한 감상자의 기억에 머물다가 천천히 사그라드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그렇게 소실되는 감상을 그럼에도 남겨야 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나의 오독으로 인해 왜곡되거나 와전될 가능성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남기는 행위 자체와 그 과정 자체가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강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분명 감상했던 것들이 점차 나의 기억 너머로 소실되어 가는 와중에도, 글로 남긴 감상이 그 원래의 작품, 심지어 나의 원래 감상과 다른 차원으로 사라진다고 해도, 감상을 남겨야 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글을 읽으며 느낀 감상을 언급하는 그 자체가 나를 풍요롭게 하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아울러 감상문만이 아니라 살면서 겪는 많은 생각이나 공상도 소실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최대한 많이 꺼내며 적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이 쌓여서 '나'를 만들고 강하게 해 줄 것이기에. |
2024.01월의 첫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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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아름답고 유려한 글을 만나기가 쉽지않다. 삶과 예술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더 나아가 인간애 대한 애정이 없다면 이런 글을 만날수가 있을까? 작가가 세밀하게 묘사한 연극은 읽는 내내 빠져들지 않을수 없고 그 연극을 상상하며 보러가고 싶게 만들었다. 내가 느낀 감정은 실제 앞에서 어쩌면 글보다 덜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꼭 한번 보고싶게 만들었다. 그가 일상을 사유하며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예술에 대해 꾹꾹 눌러쓴 글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소중함을 느낄수 있었다. 당분간 이 같은 글을 만나기도 힘들 뿐더러 작가 역시 많은 것을 쏟아낸 듯한 느낌을 글 읽는 내내 받을수 있었다. 그간 자신의 많은 이야기가 책에 녹아 있었던 거다. |
모든 문장이 좋을 수 있나? 네 있네요.. 문장과 장면, 작가님의 시선에 낭만이 묻어있어서 아껴가며 읽고 싶은 책인데 흡인력이 있어서 멈출 수는 없는 책..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 실물 책으로도, 이북으로도 구매했다. 어쩜 글을 이렇게 쓸 수 있는 걸까? 작가님이 미학에 밝으신 분이라 그런 걸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꼭지가 좋았다. |
작가가 풀어주는 공연에 대한 이야기들이, 글자로 읽는 그 이야기들이 너무 좋아서 한편으로는 접해보지 않은 그런 공연들을 찾아 보고싶게 만들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작가의 이야기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작가를 통해 '읽은' 공연들이 인상적이었다 요즘에는, 담백하게 잘 읽히는 글로도 본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들을, 그 깊이를 충분히 잘 담아내는 글들을 좋아했는데 그렇게 담백하게 쓰인 글은 분명 아니었지만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였기 때문에 새로웠고 그 새로움을 충분히 즐겁게 전달해준 작가의 유려한 글솜씨가 좋았다 계속, 읽고 싶을 만큼 드문드문, 함께 곁들여진 사진이 아주 좋았다 이 사진들만으로 만들어진 사진집이었다고 해도 충분히 나는 이 책을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
2022년 2월에 사서 2023년 10월에 읽은 이 책이 주말 내내 내 마음을 쥐고 흔들었다. 한 문단 읽고 나면 책 덮고 심호흡하고. 마음 가다듬고. 기어이 다시 읽을 작정을 하고. 그래야만 이어갈 수 있었다. 글자만 따라가다 보면 사유를 놓쳤다. 이 책을 깊게 받아들이려면 한 자 한 자 정성껏 읽어야 했다. 다 읽은 뒤 곧바로 다른 책을 펼쳤다가 세 페이지 만에 관뒀다. 대신 하루 내도록 이 책의 좋은 점을 생각했는데, 잠들기 직전에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가 밑줄 그은 문장은 모두 사람들의 움직임 뒤에 태어난 사유였다는 것을. 에세이를 읽을 때면 책을 쓴 당신 안에서만 가능한 확신들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이 고백하는 마음, 경험, 생각들은 언제나 사람이 실어다 준 것들이었다. 누군가를 만난 후 느낀 것. 누군가 권한 책을 읽고 생각한 것. 누군가의 무대를 보고 적은 것. 그런 것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얻은 것들은 일단 몸을 한 번 통과한 것이다. 내게 그것은 머릿속을 떠도는 상념만을 건져낸 것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명사가 아닌 동사, 라고 표현하겠다. 단어 하나로 맺을 수 있는 명사와 달리 동사는 움직임이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동사만이 지닌 힘이 있다고 나는 느낀다. (내가 동사보다는 명사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므로 동경을 품었을 거다.) 이 책의 동사를 소개한다. 47p. 동시대인이라는 말의 가장 적합한 정의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시대를 견디며, 시대를 견디지 못한 이들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 그리하여 어떤 죽음들에 대한 기억을 설명 없이 나누는 사람들. 함께 웃는 사람들이기보다, 함께 웃지 못하는 사람들. 무언가가 좀처럼 웃기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세대에 따라 함께 지켜본 죽음이 다를 것이다. 2000년대 초반이라면 우리는 대체로 위 문장 속 죽음의 자리에 광주를, 삼풍을, 성수대교를 대입했겠다. 2014년을 건너온 우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세월호를 떠올릴 테다. 2022년 10월 이후 우리는 이태원을 ‘놀이’의 장소로만은 대할 수 없게 됐다. 새로운 비극이 자꾸만 늘어간다. 비극이다. 이 책이 위 문단으로 그쳤다면 나 역시 떠올리고, 마음 아파하고, 다시 일상을 살았을 텐데, 64페이지 후에 기어코 동사를 데리고 왔다. 작가는 연극이 끝나고 밤의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오래 서 있어도 지겹지 않도록 일렁이는 강물을 구경할 수 있는 이유로. 시간이 걸려도 일부러 돌아가는 노선인 버스를 기다리다가. 2014년 4월 기어코 울어버렸다. 그 배가 가라앉은 지 나흘쯤이 지난 후에. 거대한 슬픔 앞에서 울어버린 동사가 뭐 그리 대단하고 특별하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47페이지에서 111페이지에 도착할 때까지 작가는 꾸준히 '몸'에 대해서 얘기한다. 내가 데리고 사는 내 몸. 무대 위 몸. 거리를 지나가는 몸. 관념의 몸. 물리적 몸. 심리적 몸. 다양한 몸의 탐구를 펼친 후, 결국 그 몸들을 구할 수 없었다는 소식을 타국에서 들었을 때. 마침 그 앞에 강물이 펼쳐졌을 때. 평소에는 시간이 걸려도 일부러 돌아갈 정도로 아름다웠던 그 강물이 펼쳐졌을 때 느낀 감정을 '혼자 운 적이 있다'고 썼다. 나는 이런 고백 앞에서 함께 울지 않는 법을 모른다. 그게 내가 이 책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유고, 추천하는 이유고, 이 글을 쓰는 이유다. |
공연예술을 이렇게 깊이 있고 밀도 있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해박한 지식에 아름다운 글솜씨까지 놀라운 맘으로 읽었다. 반면 난 왜 예술세계에 무지했을까. 부끄럽지만 너무 관심이 없었다. /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이다. 인간의 사유방법 중 공연예술도 있다. 문자의 발명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예술활동은 시작되었다. 간편하게 책으로 상대방의 감정을 전달할 수도 있지만 소리나 몸짓, 춤, 노래, 연극 등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문자와는 다른 감정의 전달방법이다. 상대방의 몸에서 몸으로 전해오며 함께 나눠가진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시간예술로서 흘러가면 그만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떤 것보다도 큰 전율과 울림이 있다. 인간이 사유하는데 공연예술은 필연적이다. / 공연예술에서 공간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어떤 공간에 있든 공간을 감각하며 나의 존재를 잊지 않으려면 흔적을 남겨야 한다. 그것이 물질적 흔적이든 기억 속 흔적이든. 무엇보다도 예술적 공간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공연과 함께 내 공간도 어우러져서 그 또한 나를 존재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남을 것이다. / 언어는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가장 편하고 간단한 방법이다. 세계 다양한 언어들 중에서 내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모국어다. 모국어로 말한다는 것은 나의 감정을 잘 전달하겠다는 의지도 함께 포함된다. 하지만 그러한 모국어조차도 말하지 않고 차라리 침묵하겠다는 것은 언어 말고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그것이 음악이며 소리이며 몸짓이며 춤 같은 종합예술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모국어는차라리침묵 #목정원 #아침달 #산문집 #공연예술이론가 |
목정원 작가님의 산문집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리뷰입니다. 프랑스에서 공연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작가님이라 궁금했습니다. 공연 예술을 발생하는 동시에 소멸하는 예술이라고 표현한 점이 와닿았어요. 요즘 대두되는 사회 문제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두고두고 꺼내 읽는 책이 될 것 같습니다. |
내 안으로 글자가 들어와 모든 것을 멈추게하며 의미를 만들어 나갈 때, 나의 테두리 밖에서 조용히 흘려가는 시간을 낯설게 바라보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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