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피스라고 하면 흔히 죽음을 기다리는 곳으로만 생각되는데, 오히려 삶을 가장 치열하고 뜨겁게 살아가는 공간으로 표현되고 있네요.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삶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사랑과 관계가 가장 본질적인 가치라는 점이 인상 깊었어요. |
농촌을 들여다 보는 것은 결국 노인과 죽음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나는 죽음에 대해 오래 생각해 왔다. 가장 가까운 가족을 둘이나 잃은 사별자의 삶, 가족에서 '유족'이라는 전환된 호명은 명사에서 동사로의 전환같기도 했다. 유독 세상은 동사로 사는 유족들이 조금씩 바꾸어놓고 움직인다. 저자 레이첼 클라크는 영국의 공중보건의이며 완화의료 전문의다. 저널리스트로 살다 1999년 런던에서 벌어진 백인우월주의자의 폭탄테러( 임신부와 세 명이 사망, 여든 명이 다친) 현장에서 '천우신조', '우연히' 살아남아 20대 후반에 의대로 진학을 한다. 지역 공중보건의였던 부친의 영향이 컸고 이 저작에서는 레이첼의 아버지의 의사로서의 삶과 암 투병, 호스피스의 과정을 호스피스전문의로서, 딸로서 담아 놓았다. 아버지의 이야기만이 아닌 호스피스 전문의 (이는 치료와 완치라는 현대의학의 목표와는 배치되는 잘 죽이는 일)로 만난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영국의 의료체계의 문제 (응급실에 베드가 나오지 않아 복도에서 뻗쳐 있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부터, 효율성과 생산성, 멸균과 청결(204)의 논리가 적용된 현대의 병원 구조에서 환자와 의료진 사이에 추상성과 인간성이 깃들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생의 마지막은 차트 몇 장으로 남을 뿐이다. 완화 의료는 여명에 대한 기대가 없고 극심한 고통에 허우적대는 이들이 장례식장으로 가기 위한 정거장이 아니다. 고통과 불안에 떠는 환자들 모두에게 호스피스가 필요하다는 것을 저자는 증명하고 증언한다. 이는 의료수용자였던 내 경험도 덧대어진 감상이다. 국내에 매우 드문 호스피스 전문의가 상주하는 호스피스 전문병원에서 언니와 함께 보낸 마지막 한 달이 없었다면 가족들은 무너졌을 것이고 더욱 큰 고통에 허우적댔을 것이다. 아직은 입 속에서 웅얼웅얼 혼잣말이 많은 상태여서 나는 이 죽음을 다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자매를 잃은 나와 엄마를 잃은 조카들, 배우자를 잃은 형부. 자식을 잃은 아버지... 슬픔의 도형이 정사각형이나 정삼각형이 아닌 기울기가 꽤 있을 것이다. 하여 나는 일단은 뒤로 빠져 있는 중이다. 그러다 이 책을 읽고 '죽음을 돌보는 사회로의 전환'에 대해서 한 마디 보탤 수 있다면 그때의 경험을 차분하게 정돈하고 나누고 싶어졌다. 특권이 아니라 보편적 권리의 호스피스와 완화의료에 대해, 마을에서 태어나 큰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더라도 치료와 요양은 집의 지근거리에서, 그리고 생의 마지막에는 크레졸 냄새가 덜 한 곳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배웅 속에서 떠나는 일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고민해 보고 싶다. 오늘 리튬건전지 공장에 큰 불이 나서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다. 이국에서 너무 뜨거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 희생자들의 소식을 멍하니 보고 있다. 뭐라도 쓰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마음에 적어둔다. |
레이첼 클라크 작가님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에 대한 리뷰입니다. 죽음의 끝자락이라고 생각했던 호스피스에서 오히려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는것 같았습니다. 죽음이 다가온사람들의 생이 더 절박하고 짧아서 그런지 더욱 생동감이 넘치는것 같았어요. 잘봤습니다. |
우리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기다리지 않는 죽음에 놓인 사람들을 보며 연민의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 책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책속의 그들은 삶의 끝을 포기하거나 놓은게 아니라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