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인간에 대한 경제학의 무관심을 비판하고 보완하기 위해 경제학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그 속의 인간들을 넓고 깊게 보여주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그리고 바람직한 경제주체와 인간의 모습을 모색하고자 한다. 물론 이에 대한 절충적인 답은 시장에서는 이기적이고, 가정과 지역사회에서는 도덕적이며, 선거장에서는 시민적인 인간일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절충적인 인간상을 한 발짝이라도 넘어서고자 한다.
--- p.8
넓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경제는 정치의 수단이고, 정치는 다시 도덕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이 입장에서 이상적인 경제는 ‘도덕적 경제’다. 각각의 경제주체는 자족을 위한 제한된 경제활동에 종사하면서, 정치적 시민으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자신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 목표를 둔다.
그러므로 근대 사회과학이 강조하기 시작한 ‘탐욕스러운 인간’이나 경제학이 강조해온 ‘경제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린 현실의 인간도 아니고 이상적인 인간도 아니다. 나아가 재화를 유일한 좋음이나 복지로 생각하는 자본주의, 특히 ‘돈’을 유일한 좋음으로 간주하는 현대의 금융자본주의와 이에 부합되는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렸던 사회와 인간을 뒤집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 p.63~34
이기심과 이타심, 그리고 각기 이들과 연결되는 경쟁심과 협동심 중 어느 것이 더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스미스 이후의 주류경제사상은 이기심과 경쟁심에 근거해 모든 논리를 전개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등장한 행동경제학과 진화생물학 등은 인간의 이타적인 습성과 원초적인 협동심 등을 강조하며 기존의 ‘이기적 인간’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반박을 내놓고 있다.
--- p.99
선택의 자유는 개인과 선택대상들의 수평적인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많은 대상들이 개인의 기호나 선호뿐만 아니라 역사적ㆍ사회구조적으로 수직적인 서열 속에 있다. 이렇게 되면 선택의 자유가 무력해진다. …
반면 프리드먼은 수직적인 상황조차 수평적인 상황으로 만든다. 그에게 인종차별은 기호나 선호의 문제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백인 주인이 흑인 종업원을 고용하지 않는 것은 주인 때문이 아니라 백인 손님들 때문이며 차별 때문이 아니라 백인 손님들이 흑인 종업원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손님이 백인 종업원을 좋아하느냐, 흑인 종업원을 좋아하느냐 하는 문제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느냐,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느냐 하는 것과 같은 문제로 취급된다. 개인의 선택에 대한 과도한 신뢰가 인종차별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선호로 규정하는 극단적인 왜곡을 낳는다. 여기서 프리드먼의 일관성, 용감함과 함께 그의 확실한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 p.166~167
표준이론에서 시장과 가격은 익명적이다. 이론적으로는 완전경쟁시장이 그러하고 현실적으로는 백화점이나 편의점, 배달 전문 앱 등이 이를 대변한다. (지역이나) 고객에 관계없이 일률적인 일물일가로서의 가격은 익명적이다. 일상적으로 편의점에서 물건을 골라 지불할 액수를 확인한 후 돈을 지불하면, 점원과 거의 대화할 필요가 없다.
시장이 익명적이므로 사람들은 이름이 아니라 숫자나 번호로 기억된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계산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면서 이런 성격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에 비해 지역이나 고객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가격차별’은 익명성을 줄인다. 합리적 경제인도 익명적인 시장에서 주어진 가격을 지불하고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에 가깝다. 이것은 경제인이 가격이나 품질에 대해 특별히 소통하거나 흥정하거나 협상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같이 경제인은 협상가나 흥정하는 사람 혹은 외교관과는 일차적으로 거리가 있다.
--- p.193
마르크스가 서술하는 경제주체와 신고전학파의 경제인 사이에 차이가 있다. 신고전학파에서는 돈에 대한 섬김도 경제인의 선호와 선택의 문제다. 경제인은 합리적이어서 자신의 선호와 상황에 비추어 돈벌이를 선택할 수도 있고 쓸데없는 돈을 벌기보다 여가를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런 선택은 돈으로 구입할 사용가치나 재화가 낳는 효용과 여가가 낳는 효용 중 어느 것이 더 큰가에 달려 있다.
반면 마르크스의 경제주체들은 자본주의의 논리를 ‘본성’으로 삼기 때문에 이런 판단이나 절제의 여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마르크스에게서는 돈에 대한 섬김도 개인의 선호ㆍ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체제ㆍ구조의 문제다. 자본주의체제가 맹목적인 화폐 추구를 요구하므로 경제주체들도 이같이 행동한다. 맹목적인 체제 안에서 맹목적으로 움직이지만 이들 경제주체는 체제에 부합되는 인간이므로 지극히 정상적이라 간주된다.
--- p.254
케인스의 이론은 좌파와 우파의 경제학이 모두 법칙, 구조, 과학적 원리를 강조하면서 경제주체의 존재를 약화시키거나 부정했던 것과 대비된다. 특히 신고전학파는 주어진 선호와 기술로부터 자동적으로 시장의 균형을 달성하는 개인의 선택을 강조하지만, 이는 명목적인 개인에 의존하는 기계적인 메커니즘일 뿐 실질적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고려한 것이 아니다.
케인스가 균형이자율을 부인하면서 이자율이 관례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 속에 있다. 이자율은 시장원리보다는 경제주체들 사이에 상호의존적인 작용 속에서 결정된다. 이는 케인스가 경제에 있어서 균형을 상정하지 않으며, 경제주체들도 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경제주체들은 제한된 정보에 근거해 인식하고 기대를 형성하므로 반드시 균형을 낳지 않는다. 이 점에서 케인스의 경제주체는 완전한 정보에 근거해 미래를 예측하고 균형으로 나아가는 신고전학파의 경제인과 다르다.
--- p.309~310
인간은 자신이 그다지 이기적이거나 자기 위주로(A) 살지 않고 시민적이고 사회적이며 헌신적이라는(non-A) 믿음을 자신에게 정착시키려고 노력한다. 혹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집단 전체를 위해 어떤 입장이나 행동을 내세운다고 스스로에게 위장한다. 이런 목적으로 사람들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신호를 보내거나,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위장하거나, 심지어 자신을 기만한다.
많은 사람들이 특정 대통령 후보에게 표를 찍으면 안 된다고들 하니, 여론조사에서는 그에게 투표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그에게 표를 던진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이중적이거나 양면성을 지니게 되며,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表裏不同’을 보인다. 여기까지 오면 경제주체들이 흔한 소설과 영화에 등장하는 인간만큼 복잡해지고, 일상에서 우리가 겪는 인간에 가까워진다. 과연 인간은 표준이론이 상정해왔던 경제인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
--- p.363
센은 객관적 조건이나 자원을 확보하는 것을 넘어서, 경제주체들이 자원을 활용하여 기능이나 능력들을 개별적으로 다양하게 함양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혹은 구성원들에게 동등한 기능을 보장하려면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른 수준의 자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영양이나 교육을 받아들일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충분한 사람보다 더 많은 영양과 교육시간을 제공해야 한다.
이같이 센의 입장에서는 쾌락이나 효용뿐만 아니라 자원을 균등하게 제공하는 것도 사람들의 동등성을 확보하는 데 충분치 않다. 경제사회주체의 필요에 따라 자원을 차등적으로 공급해야 비로소 기능이나 능력이 비슷해진다. 센에게서 진정한 평등은 ‘기회의 균등’이라는 형식적인 평등이나 ‘자원의 균등 공급’을 넘어서 각자에게 필요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동등한 능력의 배양이다.
--- p.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