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속으로 손을 넣어 이리저리 휘젓자 완성될 듯 완성되지 않던 그 거인 여자의 얼굴은 물방울과 함께 사라졌다. 이번에도, 아니 이번만큼은 그녀의 모습이 완성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숲 속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호숫가까지 이어지던 외길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두워진 숲 속엔 황홀한 빛깔의 꽃가루가 정령처럼 날아다녔고 아직 태양의 온기가 남은 황금빛 열매들이 투두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앉은 채로 스니커즈를 벗고 청바지 밑단을 올린 후 호수 수면에 맨발을 대 보았다. 이내 발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된 선뜩함이 전율처럼 온몸으로 퍼져 갔다. 미수는 눈을 꾹 감고 호수 속으로 두 다리를 깊이 담갔다. 셋까지세고 난 뒤 이 안으로 들어가리라, 미수는 다짐했다. 하나, 둘. 다시.
하나.
둘.
그리고…….
--- p.16
형광등을 껐다. 방과 현관 사이의 문턱은 미수가 이 방에서 가장 좋아하는 지점이었다. 미수는 곧 문턱에 앉아 두 손을 현관 으로 내밀어 새 모양을 만들어 보았다. 할머니 방에서 현수에게 보여 주곤 하던 그 새였다. 장난감 하나 없는 그 방에 하루 종일 갇혀 있다 보면 현수는 자주 뻗대거나 울었고 미수는 뭘 해서라도 현수를 웃게 해 줘야 했다. 보안등이 켜졌다. 노래할 줄 모르는 새는 현관 바닥에 나타나 부드러운 날갯짓을 하다가도 금세 미수의 방 저편 숲 속으로 잠적했다. 새가 잠시 갔다 오는 그 숲은 세계의 끝일 것만 같았다. 아마도 은백색 가지로 사랑을 속삭이는 나무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숲, 그런 곳. 보안등이 다시 꺼졌다, 켜졌다. 미수는 졸음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숲에서 새를 불러왔고 다행히 새도 지치지 않고 미수의 방을 방문해 주었다.
--- pp.29~30
그때였다. 무언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조심스럽게 옆을 보니 윤이 난간 너머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가스총을 입안에 밀어 넣고 있는 게 보였다. 미수는 꿈쩍도 하지 못한 채 그의 행동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알루미늄 합금의 이물감 때문인지 윤은 이내 입에서 가스총을 빼고는 등을 구부려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했다. 헛구역질이 잦아들자 이번엔 가스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짓눌렀는데, 그의 손등에 돋은 파란 심줄과 무섭도록 붉게 충혈된 눈동자의 실핏줄이 줌인된 카메라로 들여다본 것처럼 지나치게 선명했다. 뒤늦게 난간에서 내려와 그에게서 총을 빼앗으려 했지만 그곳은 촉감이 제거된 세계였으므로 어떤 짓도 소용없었다. 총알이 발사되지 않을 거라는 건, 안다. 총알이 장전되지 않은, 심지어 가스조차 충전되지 않은 무력하고 무해한 가스총일 뿐이었다. 영원히 발사되지 못할 총. 어쩐지 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개가 없는 새처럼.
--- pp.42~43
탈출에 실패했으니 그대로 보스에게 돌아가면 모진 매를 맞아야 할 터였다. 운이 나쁘면 손가락 하나가 잘릴지도 몰랐다. 그러나 소년은 그 어떤 잔혹한 형벌보다 그 형벌조차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조직의 바깥 세계가 더 무서웠다. 유저들은 끊임없이 알려 줬다. 소년은 버그라고, 소년의 생존이 밝혀진다면 전체 시스템엔 치명적인 오작동이 일어날 거라고 그들의 검은 입술들은 확신했다. 보스는 어떤 방식으로든 소년을 찾아낼 것이므로 소년과 함께 있는 한 M 역시 도망가고 숨어야 하는 배역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며 겁을 주기도 했다. 소년은 보스의 조직 안에서만 안전했다. 조직의 바깥에서 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소년을 증명해 줄 서류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 p.53
그때는, 그 모든 것이 진짜 인생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 변하는 건 없었다.
(……)
온갖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2년여 동안 하면서 윤은 조금씩 깨닫게 됐다. 그런 생활이 가짜라는 확신이야말로 가짜였다는 것을, 애초에 배당되었던 레일은 이미 오래전에 다른 레
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저 앞만 보며 뛰어왔다는 것도.
(……)
윤은 상자에서 하늘색 육상화를 꺼내 신었다. 촛불을 껐다.
방 안은 완벽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어두운 방엔 푸르른 투명함으로 빛나는 물방울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물방울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쩌면 미수가 흘리고 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윤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 방 안을 심해의 해파리 떼처럼 떠다니는 갖가지 모양의 물방울들을 넋 놓고 올려다봤다. 아까부터 빈방엔 또다시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윤은 움직이지 않았고, 수면 밖으로 솟구쳐 나가지도 않았다.
--- pp.108~111
바닥엔 빈 병 하나가 쓰러져 있었고, 병 안에서는 초여름의 숲처럼 초록색 바람이 불고 있었다. 소주병을 집어 들어 주저 없이 내리치자 바람 한 줌이 미수의 손안에 들어왔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미수는 그 바람을 꼭 쥐었다. 오래오래, 이 바람을 간직해 두고 싶었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피곤해서인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손바닥은 좀 쓰라렸지만 못 견딜 만한 통증은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 보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자꾸만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 pp.125~126
간절하게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버그나 몬스터의 배역 따위 없는 곳, 갚아야 할 빚도 없고 되새기고 또 되새겨야 하는 기억도 없는 곳, 칼이나 날카로운 유리 조각도 없는 곳, 사람이 상하지 않는 곳, 사라지거나 위장되는 자도 없는 곳, 그런 곳. 숲이라면 좋을 듯했다. 호수가 있는 숲, M 외에는 그 누구도 가 본 적 없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M만의 숲이라면 남은 인생이 긴 낮잠으로만 소모된다 해도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편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p.131
곧 숲의 입구가 나왔다. 숲에선 햇빛이 부챗살처럼 부드럽게 갈라져 키 큰 관목 사이로 스며들었고, 바람 끝엔 물에 젖은 풀꽃 향기가 희미하게 실려 있었다. 백색 사슴과 외뿔 말들이 발소리도 조심해하며 고요하게 소년을 따라왔다. 새들의 지저귐이 한 번씩 들려올 때면 소년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나무 위 어딘가를 올려다보곤 했다.
드디어 호수가 나타났다.
한 발 한 발 다가가자 호숫가엔 누군가 왔다 간 흔적이 보였다. 풀잎이 한곳으로 쓸려 있는 곳엔 나무 열매 껍질과 물에 젖은 나뭇잎들이 널려 있었다. 낯익은 긴 갈색 머리카락도 몇 가닥 보였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담요와 내의, 책과 잡지, 과자와 음료수 같은 것들이 하나씩 생겨나기도 했다. 모두, M이 놓고 간 것이었다. 소년은 깍지 낀 두 손에 머리를 대고는 M이 앉았다 간 바로 그 자리에 누웠다. 이곳에서 시작되었을 이야기라면 소년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이야기는 숲의 모든 곳에 깃들어 있었고, 시시각각 걸음을 옮기는 빛을 따라 한 줌씩 소년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빠르게 지나가는 구름을 올려다보다가 소년은 깜빡 잠이 들었다.
--- pp.160~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