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소쉬르를 통해 각 기호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으며 각각의 기호는 하나의 의미를 표시하기보다는 그것과 다른 기호들 간의 차이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랑그langue는 이름terme이 아닌 ‘차이’에 의해 생성된다고 볼 수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랑그에서 나온 이름들은 단지 그들 간에 나타나는 차이를 통해서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좀 어려운 개념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만약 A라는 단어와 B라는 단어의 이름이 아무 뜻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두 단어 사이에 어떻게 의미의 차이가 생기는지 알 수 없으며, 만약 의사소통이 화자의 랑그 전체에서 청자의 랑그 전체로 진행된다면 반드시 그 랑그를 알고 있어야만 대화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첫문장」중에서
이렇게 말의 연쇄가 끊임없이 교차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대화를 가시적으로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어떤 음소계가 출현하면 마침내 어린아이는 말문을 트게 된다. 전체로서의 랑그만이 어린아이를 어떻게 언어의 세계로 끌어들이는지, 그리고 어떻게 어린아이가 안에서만 열리는 문의 안쪽으로 들어서게 되는지 설명할 수 있다. 랑그가 내면을 가지고, 결국에는 하나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은, 기호가 변별력을 가지고 스스로 구성, 조직되기 때문이다.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중에서
말로Malraux는, 회화와 언어를 그것들이 ‘재현하는’ 것과 떼어놓음으로써 그것들을 창조적인 표현의 범주 안에 결합시킬 때에만 회화와 언어가 비교될 수 있다고 했다. 회화와 언어가 같은 성향을 지닌 두 개의 형식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 화가와 작가는 수세기 동안 자신들이 하고 있는 작업의 유사성에 대해 의심해보지 않은 채 일해왔지만, 이들이 동일한 모험을 감행해온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미술과 시는 처음에는 도시와 신을 비롯해 신성한 것에 헌정되었고, 외부의 힘을 거울같이 반영하면서 비로소 자신들의 진정한 기적을 탄생시켰다. 그러다가 얼마 후 자신들은 성스러운 시대의 세속화로 나타난 고전주의 시대를 겪게 된다. 당시의 회화는 자연의 재현, 즉 자연이 회화에게 가르쳐준 비법에 따라서 자연을 이상적으로 미화하는 재현이었다. 라 브뤼예르가 말했듯이, 이 시대의 파롤은 언어에 의해 사물 자체에 미리 할당된 정확한 표현을 재발견하는 것 외에 다른 역할은 일절 수행하지 않았다.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중에서
당대의 라이벌이자, 후세 사람들이 쌍둥이로 알고 있는 들라크루아와 앵그르는 고전주의적인 화가이기를 원했으나 고전주의를 새롭게 해석하는 데 머물러야 했다. 이러한 스타일은 창작자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으며, 박물관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작품들을 모아들일 때나, 사진으로 세밀화를 확대하고 그림의 한 부분을 틀에 끼워 하나의 그림으로 변형시키고, 스테인드글라스, 양탄자, 동전 등을 그림으로 변형시켜서 회화를 항상 회고적으로 의식할 때에만 눈에 보이게 된다. 그러나 만일 표현이라는 것이 재창조하고 변형시키는 일이라면, 우리 시대 이전이나 회화가 존재하기 이전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각은 이미 사물들 속에 인간적인 제작의 흔적을 새겨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중에서
동굴 벽화에 그려진 최초의 그림이 하나의 전통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또 다른 전통, 즉 지각이라는 전통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예술의 준영원성은 몸으로 구현된 실존의 준영원성과 뒤섞여 있다. 우리는 몸과 감각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몸과 감각이 우리를 세상에 밀어 넣는 만큼 우리는 몸과 감각을 실행하고, 우리의 문화적 몸짓화가 우리를 역사 속에 끼워 넣어주는 만큼, 우리는 무엇이 문화적 몸짓화인지 이해하게 된다. 언어학자들은, 라틴어가 끝나고 프랑스어가 시작되는 날짜를 역사 속에서 엄밀히 표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단 하나의 언어와 함께 끊임없이 작용하는 단 하나의 혀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마치 우리 몸이 가능한 모든 대상을 지배한 덕분에 하나의 공간을 이룬 것처럼, 표현의 계속적인 시도가 하나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중에서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우리의 ‘고유한 몸corps propre’은 의식의 지향성에 의해 의식화된 몸이 아니라, 의식이 몸의 지향적 특성에 입각해서 자신을 세계의 사건으로 발견되게 만들어주는 몸이다. 따라서 몸의 지향성은, 단순한 몸의 반사행위조차 객관적이고 맹목적인 자극의 결과가 아니며, 어떤 상황에 처한 몸의 지향적인 표현으로서 주관의 실존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메를로 퐁티의 존재론적 현상학」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