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중국령 투르키스탄’이라는 호칭은 이 지역 역사의 주요 특징―종족적 다양성과 문화 영역의 중첩 지역이라는 상황―을 반영하며 지난 세기의 대부분 동안 이 대륙의 교차로를 괴롭혀 왔던 종족적·정치적 정체성의 융화라는 문제를 구체화하고 있다.---p.25
언급했듯이 ‘중국령 투르키스탄’이라는 용어는 이 지역의 문화적·정치적 다양성, 즉 여러 문화와 정치적 영향력이 서로를 배척하기보다는 중첩되는 이 지역의 성질을 함의하고 있다. 실크로드의 교차로로서 신장은 지중해 지역, 페르시아, 인도, 러시아 그리고 중국을 연결하는 통로에 걸쳐 있다. 따라서 신장은 유라시아 전역의 예술과 기술, 사상 및 교역 물품이 이동하는 통로이자 용광로였다. 구석기 시대의 수렵·채집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뒤를 잇는 초기 유라시아의 농부들과 유목민들 역시 신장을 횡단했다. 그리고 승려와 선교사, 상인, 군인, 정착민 및 여행자가 그 뒤를 이었다. 신장은 또한 유목 사회와 정주 사회의 접점이자 초원 출신의 유목민인 흉노족, 투르크족 및 몽골족과 타림 분지 오아시스의 농민들이 만나는 공간이었다.---pp.27~28
흉노의 쇠퇴와 한의 붕괴 이후 이어진 300년 동안 신장의 상황은 역사적으로 충분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중국의 정치·군사적 혼란으로 인해 북중국에 기반을 둔 국가들은 타림 분지에 단지 제한적이고 간헐적으로만 개입할 수 있었다. 비록 이 시기가 중국에서는 종종 암흑의 시대처럼 다루어지고 있지만, 타림 분지에서는 교역 및 외교적·종교적 왕래가 여전히 활발했으며 심지어 중국의 서북부는 계속해서 인도 및 소그디아나와 연결되어 있었다. 실제로, 3~6세기 동안 소그드인의 상업적 네트워크는 타림 분지와 간쑤 회랑으로 확대되었으며 불교는 바로 이 연락망을 통해 발달하고 크게 융성했다.---p.68
이슬람화의 결과 신장 지역은 문화적으로 그 서쪽 지역, 곧 중앙 및 남아시아의 광범위한 페르시아 또는 차가타이 투르크어 문화 지대와 연결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신장은 전략적으로 여전히 북중국에 기반을 둔 세력과 몽골에 기반을 둔 세력 사이의 역학 관계에 얽혀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패턴에는 하나의 단계가 더 있었는데, 북중국에 기반을 둔 세력은 초원 제국에 대한 원정의 일환으로 신장을 향해 서진했다는 사실이다.---p.138
1864년의 반란은 현재 많은 경우 위구르인들의 독립 운동 중 하나로 다루어지고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청 체제와 벡들에 대한 적개심이 그 원동력이었고 물라 무사 사이라미(Mulla Musa Sairami)와 같은 무슬림 역사가들에 의해 성전이라는 수사를 얻기는 했지만, 1864년의 반란에 대한 이와 같은 묘사는 다양한 상호 적대적인 행위 주체들을 비롯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일련의 사건을 대단히 단순화시키는 것이다.---p.185쪽
정복 후의 신장을 겨냥하여 좌종당은 자신이 계획한 개혁의 이면에 있던 한화에 대한 열망에 발맞추어 무슬림들을 중국식으로 교육할 것을 주창했는데, 이는 “만약 우리가 그들의 독특한 풍습을 바꾸고 이들을 중국의 방식[화풍]에 동화시키고자 한다면 의숙을 세우고 무슬림 아이들이 (중국의) 책을 읽고 한자에 익숙해지며 구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p.219
제2동투르키스탄 공화국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은 라쇼몽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학자, 국가 및 정치 행위자들은 최초의 반란과 일리 체제의 배후에 실제로 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이견을 보인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록들은 후일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의 지도자가 된 몇몇 인물들(특히 중화인민공화국의 저자들이 반란의 격렬한 반한족적 경향에 반대한 것으로 인해 영웅시하고 있는 압둘 케림 아바스Abdul Kerim Abbas)에 대한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강조한다. 동시에 이들은 은밀히 소련의 역할도 인정하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의 자료에서 ‘삼구 혁명’은 공식적으로 전반적인 중국 혁명의 일부, 즉 소련의 후원을 받아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발생한, ‘반동적인’ 국민당 통치에 대항하는 소요 사태로서 다루어지고 있다.---p.321
문화 대혁명 초기의 고조된 사회적 불안과 중앙의 통제력 상실 속에서, 신장의 투르크 민족들이 정치 운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이는 정말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중앙의 지도부 중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는 적어도 신장의 ‘소수 민족들’이 정치화되거나 파벌 투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보인다.---p.383
신장의 국제적인 면모는 스카이라인과 함께 높아지고 있다. 한때는 중국 외부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인권과 종교적 자유, 테러리즘, 에너지, 중앙아시아에서의 중국의 위상이라는 문제들이 이 지역을 헤드라인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인터넷과 인쇄 매체에 오르내리도록 하기 때문에, 신장과 위구르인들은 이제 세계 언론의 보도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p.402
신장은 여러 민족의 고향이며 여러 역사의 무대였다. 신장이 특정 집단을 위한 배타적인 무대가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두를 위한 공동의 고향이라는 사실에 서로 다른 민족들이 동의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이들이 이 지역의 역사를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활용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또한 이 문제는 서로 다른 민족들이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서로를 그리고 신장의 환경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의해 더욱 좌우될 것이다. 미래의 영웅들은 민족 간의 분열을 봉합할 뿐만 아니라 신장, 중국 그리고 세계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그들은 균형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p.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