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날 즈음, 나는 바지런을 떨며 집안의 묵은 먼지와 때를 벗겨내곤 한다. 성주신에 대한 예를 표방하나 그저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는 막연하고도 무책임한 기복일 것이다. 겨우내 얼어 있던 한옥의 흙벽이 서서히 흘러내리기 시작하면 그 간극을 메꾸는 것도 이맘때 할 일이다. 꽃샘추위가 찾아올지언정, 매서운 추위와 작별을 고하는나름의 의식이다. 천장과 벽 사이 희미하게 늘어진 묵은 거미줄을 떼어내고, 레몬 오일을 듬뿍 묻힌 마른 수건으로 서까래와 대들보, 기둥을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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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봄의 끝자락에는 지나가는 계절을 붙잡기 위해 나만의 작은 의식을 치르곤 한다. 제철을 놓치면 꼬박 한 해를 기다려야 다시 만날 수 있는 어여쁜 딸기로 이것저것 만들어 보는 것이다. 초봄의 딸기가 생명력 넘치는 상큼함 그 자체였다면 늦봄의 딸기는 검붉게 농익어 달고 깊다. 가판대에 쌓이는 딸기의 양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대로 장바구니에 넣지 않으면 흘러가는 봄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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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도 을지로를 오가며 부자재를 실어다 나르길 수 차례. 빛바랜 서까래의 먼지를 털어내고 나무 사이로 손수 기름칠을 하고, 새하얀 회벽을 덧바르며 여전히 이곳에서 삶은 지속되고 있다. 여태껏 제반 시설이 모두 갖추어진 환경에 살며 집을 휴식과 수면의 장소 정도로 여겨왔던 우리는 손수 집을 고치고 가꾸어 나가며 비로소 어렴풋이나마 그 의미를 사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일과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 공존하는 지속가능한 삶을 이어가게 된 것 또한 이 공간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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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줏대감 미셸의 감각을 좇아 여름이 성큼 다가왔음을 감지하고 가장 먼저 러그를 걷어냈다. 그리고 꼬박 일 년 만에 대자리를 펼친다. 아직은 이른 감이 들지만, 절기에 따라 변화하는 생활 방식은 일상을 환기시킨다. 때 이른 한낮 더위에 달아오른 체온을 식히기 위해 대자리 위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좌식 생활로 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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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세간이 널브러진 어수선한 여름의 한옥에서는 덕분에 봉인 해제된 추억들이 잠깐씩 일상을 환기시킨다. 축축해진 책을 한 장씩 훑어보거나, 고온다습한 무더위 속에서 두꺼운 옷을 걸치며 괜스레 겨울을 그리워하는 나날. 흘러간 계절을 뒤로하고 건넛방으로 물러간 라디에이터가 한 번씩 안채로 나들이 나오는 것 또한 장마철 풍경이다. 한여름 무더위를 뜨거운 음식으로 이겨내듯, 한옥의 나무와 흙, 돌이 머금은 다습한 기운을 라디에이터의 열기로 누그러뜨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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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과 서쪽, 음과 양, 대나무와 소나무, 청과 홍… 대칭을 이루는 한 쌍의 개별체가 어떤 방향을 기준으로 어떻게 놓이는지 나는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그 형식은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혼을 준비하며 차곡차곡 쌓은 일탈의 추억,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전통문화를 일상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작지만 커다란 이벤트, 이 모든 행위가 손때 묻은 주거 공간 속으로 수렴되는 자연스러움, 그거면 된 거다. 결혼 준비는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에 그리던 미장센과 어긋나 버렸지만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우연과 무지와 실수와 인연이 겹쳐 이 작은 혼례식을 채워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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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가 내려앉기 전에 온전한 허브 한 조각이라도 딸 수 있기를, 괜스레 분주한 마음이 깃든다. 차일피일 수확을 미루던 당근도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하자 한꺼번에 식탁 위로 옮겼다. 옥상 정원과 부엌의 거리는 고작 열 걸음도 채 되지 않건만, 도심 속 작은 공간에서 결실을 맺은 나만의 작물을 마주하는 건 언제나 벅찬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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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꿀과 설탕에 버무려진 채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자연 숙성되어가는 계절의 보석들. 밀봉된 유리병을 열어젖히는 순간 달콤하고 향긋한 향기가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 속으로 천천히 스며든다. 과즙과 뒤섞여 고유의 빛을 발하는 눅진한 과일청 한 스푼에 뜨거운 물을 부어 천천히 마시고 나면 추위에 움츠러든 몸과 마음 또한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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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며 좋은 사람들과 두런두런 앉아 식사를 즐기던 연말의 어떤 날, 뜨거웠던 한 해의 기억을 빛바랜 추억으로 남긴 채 여전히 지속해 나아갈 일상을 위해 정성스럽게 차린 식탁 위로 온기를 나누어 본다. 그렇게 젊은 날 우리에게는 불 위에서 끓고 있는 향긋한 밀크티 냄새가 차가운 공기를 감싸고 고양이가 발밑에서 졸고 있는 풍경이 하나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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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흘러가는 겨울의 정취를 따라 새까만 목도리 하나를 엮기로 했다.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나누기 위해 라디에이터 곁에 둘러앉아 각자의 일상을 유영한다. 나의 손끝은 검은색 캐시미어 털실로 물들어 가고, 곁에 앉은 남편의 손끝은 쌓아 놓은 귤껍질을 까느라 노랗게 물들었다. 검은색 실뭉치를 호시탐탐 노리는 고양이의 사랑스러운 콧날은 털실 끝을 향해 유독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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