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백은 고개를 숙여 황재하의 머릿결에 얼굴을 파묻고는 깊이 호흡하며 황재하의 향기를 느꼈다. 차고 맑으면서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그 옅은 향기는, 마치 내리자마자 금세 녹아버리는 봄눈처럼 이서백의 의식을 녹여 완전한 공백 상태로 만들었다. 언제인지 모르게 황재하의 손도 이미 이서백을 안고 있었다. 황재하는 이서백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빠르게 뛰는 두 사람의 심장 소리를 느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참이 지나서야 이서백이 황재하를 놓아주며 말했다. “무슨 소식을 듣더라도 절대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거라. 그저 안심하고 기다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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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하는 이서백의 떨리는 몸과 가빠지는 호흡을 느꼈다. 마치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소년 같았다. 황재하는 평소 늘 냉담하고 침착하기만 하던 이 남자를 살짝 놀려주고 싶었으나, 입을 열고 입꼬리를 끌어올리기도 전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먼저 솟구치며 흘러내렸다. 황재하는 이서백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자신의 눈물이 이서백의 비단옷에 스며들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장안의 깊은 가을날, 금빛 석양이 드리우고 흐드러지게 핀 국화꽃 향기가 기왕부의 모든 누각을 뒤덮었다. 이 순간의 평안과 고요는, 어쩌면 두 사람에게 남은 마지막 평온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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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하, 부디 널 만난 걸 후회하게 만들지 말거라.”
황재하가 얼굴에 참담한 미소를 드리우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서, 저희가 만난 것조차 잘못인 것입니까?”
이서백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가서 짐을 챙기거라. 눈이 그치면 곧바로 남조로 길을 나서거라.”
“좋습니다……. 떠나드리지요.” 황재하는 그 말만을 남기고는 이서백을 더는 쳐다보지 않고 그대로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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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하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갑자기 몸이 세게 앞으로 당겨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이서백의 품에 단단히 안겼다. 황재하는 깜짝 놀라 벗어나려 했으나, 이서백의 몸에서 나는 침향목 향기에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마치 높은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온몸에 조금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서백은 뒤에 있던 기둥에 황재하를 살짝 밀어붙이더니 고개를 숙여 황재하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황재하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 이서백에게 상처를 주면서 동시에 자신에게도 상처가 되는 말들이 모두 황재하의 입 안으로 다시 삼켜졌다. 더는 그 어떤 말도 새어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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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올 것은 오게 되어 있으니 피할 곳은 없다고요. 그러니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을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황재하는 손을 뻗어 이서백의 손등을 감싸 쥐며, 분명하면서도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항상 전하 곁에 있습니다.”
이서백이 지금까지 황재하에게 수없이 했던 말이었다. 이번에는 그 말을 황재하에게서 들으며 이서백은 저도 모르게 손을 뒤집어 황재하의 손을 세게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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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백이 황재하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잠시만 이대로 있어다오……. 잠시만…… 안고 있으마.”
황재하는 눈을 감고 살며시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를 강하게 감싼 이서백의 손 위로 살짝 포갰다. 이서백은 황재하를 거세게 껴안고서 황재하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치 황재하의 숨결이 한 줄기도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탐욕스럽게 흡입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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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희망이었다. 그 희망은 황재하의 것이기도 했고, 이서백의 것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이 지푸라기를 잡지 않는다면, 황재하와 이서백은 지금 이대로 장안의 어두운 밤 속에 침몰해버려, 물거품 사라지듯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황재하는 가만히 두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꼭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으나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황재하는 눈을 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을…… 왕 공자님 뜻에 맡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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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진은 가만히 황재하를 바라보며 꽉 쥐고 있던 두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힘겹게, 하지만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난 절대 네 편에 서 있을 거야. 세상 모든 사람이 뭐라 말해도, 모든 사람이 널 배신한다 해도, 나 주자진은 절대 황재하를 믿을 거야.”
황재하의 눈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며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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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탄하게 권문세가에 시집가 평온하고 안정된 삶을 살며, 평생 부군을 섬기고 자녀를 양육하며 사는 삶……. 그것은 황재하가 나푸사를 타고 장안으로 달려오던 그 길 위에서 이미 지워버린 삶이었다.
이후 황재하의 인생은 또 다른 길로 들어섰다. 눈앞에는 안개가 자욱했고, 두 발이 디딘 땅은 어떨 땐 향기로운 풀밭이었다가 또 어떨 땐 가시밭길이었다. 안개가 걷힌 뒤에는, 눈앞이 낭떠러지일 수도 있고, 탄탄대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 되든 상관없었다. 황재하는 여전히 고개를 꿋꿋이 세우고 맞이할 것이다. 설령 천신만고의 위험이 기다린다 해도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황재하가 선택한 길이었고, 그 길 위에서는 줄곧 이서백과 함께일 테니까 말이다.
--- p.412
‘어쩌면, 기왕이 죽어야만 나에게 기회가 생기는 게 아닐까.’
왕온은 무의식적으로 말고삐를 세게 잡아당겼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내 다시 맹렬히 뛰는 심장을 느끼며 깊이 심호흡한 뒤 핏빛 달을 올려다보았다. 입가에는 한 줄기 미소마저 드리웠다…….
--- p.509
“늦은 밤 이리 찾아온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서백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참 동안 황재하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황재하의 팔을 잡아당겼다.
소맷자락 너머 황재하의 부드러운 살갗에서 미세한 온기가 느껴지자, 이서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참, 꿈인 줄 알았구나.”
순간 황재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상하리만치 따뜻한 무언가가 눈 깜짝할 사이에 가슴을 가득 채웠다. 황재하는 이서백의 손을 붙잡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꿈이라면, 그 또한 나쁘지 않겠어요.”
이서백은 살짝 미소를 띠고는 황재하를 안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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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전하가 저를 버리게 두진 않을 거예요.” 황재하가 나지막이 이서백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목소리는 흐릿하고 어렴풋했으나, 확고함이 느껴졌다.
이서백은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너 자신에게 그렇게나 자신이 있는 게냐.”
황재하는 이서백의 가쁜 숨소리와 자신의 귓가로 뿜어지는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살짝 몸을 떨었다. “아니요. 저는…… 전하에게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 그 부분에서는 확실히 자신을 가져야 마땅하지.” 황재하를 거세게 껴안고 있는 이서백은 가쁜 호흡과 맹렬하게 뛰는 심장 때문에 목소리마저 흐려졌다. “왜냐하면 난, 아무래도 이미 네 것이 된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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