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성호를 그은 후 재빨리 침대로 올라가서 잠옷의 끝자락을 두 발 밑으로 접어넣고는 싸늘한 하얀 시트 아래서 온몸을 웅크리고 누운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기도를 올려으니 죽어도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겠지. 이렇게 몸이 떨리는 것도 멎을 것이고, 기숙사의 소년들에게 잘 자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덮고 있던 것 너머로 잠시 내다보니 침대 앞과 사면에서 노란 커튼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스등불은 조용히 낮아지고 있었다.
생도감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갔다.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계단을 내려가서 복도를 따라가는 걸까? 어둠이 보였다. 밤이면 검정 개 한마리가 마차의 등불처럼 눈에 불을 크게 켜고 어둠 속을 나돌아 다닌다는데 그게 정말일까? 그 개는 한 살인자의 유령이라는 것이었다. 무서움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몸을 떨었다. 성의 침침한 현관이 보였다. 옛날 옷을 입은 늙은 하인들이 계단 위에 있는 다리미방에 있었다. 오래전 일이었다. 그 늙은 하인들은 말이 없었다. 그방에는 불이 있었지만 현관은 아직도 어두웠다. 누군가가 현관에서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원수(元帥)의 제복인 흰 외투를 걸치고 있었는데 얼굴은 창백하고 기이해 보였으며 한쪽 손으로 옆구리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이상한 눈초리로 하인들을 바라보았다. 하인들은 그를 쳐다보았고, 주인 어른의 얼굴과 외투를 눈여겨 보며 그가 치명상을 입은 것을 알았다.
기숙학교에 다니던 유년기부터 대학에 진학하기까지 5장으로 나누어져 있는 일화들은 주인공 스티븐이 예술가로 자신을 인식하게 되어가는 과정의 안과 밖을 그려보인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바깥 세상은 정치와 종교가 삶의 두 버팀목인 혼란스런 아일랜드. 감수성 예민한 스티븐은 그 속에서 성장기의 통과의례를 겪고, 극심한 종교적 죄의식에 시달린다. 하지만 결국 그는 모든 현실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하는 예술가의 삶을 선택하고, 스스로 조국과 종교를 등진 유배생활을 자처해 나선다.
이 성장소설에 방점을 찍게 하는 것은 그 내용 뿐 아니라 형식 덕이기도 하다. 소설은 3인칭 시점으로 진행되지만, 주인공 스티븐에게 뭔가 다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작가는 주저없이 그의 상념으로 독자를 인도하여 '옆길'로 빠진다.
또한 스티븐의 의식의 흐름은 주로 그의 감각에서 촉발된다. 그가 무언가를 만질 때, 볼 때, 맛볼 때, 들을 때, 그의 마음 속에서 어떤 기억과 상상들이 퉁겨져나오는 것이다. 그 다면적이고 풍성한 실타래를 따라가는 것은 어떻게 섬세한 소년의 마음속에서 사건들이 기억으로 재구성되는지, 어떻게 소년의 감수성이 그를 예술가로 이끌어가는지를 알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