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지금 어디에 있나?”
“예, 오늘 오후에 도쿄에 도착했습니다.”
이후락이 바로 대답했다. 박정희의 시선을 받은 이후락이 말을 잇는다.
“지난 6일, 김대중은 워싱턴의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한민통 미국 지부를 결성한 후에 바로 일본으로 온 것입니다. 일본에서도 한민통 일본 지부를 결성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조총련과 북한 측이 적극적인 호응을 할 것이므로 사전에 차단할 계획입니다.”
박정희가 입을 꾹 다문 채 외면하고 있었으므로 이후락의 등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보고는 계속한다.
“현재 민단 측 가담자는 스물네 명, 조총련계는 서른두 명, 그리고 북한 측으로 추측되는 인사가 여섯 명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불쑥 박정희가 말을 잘랐으므로 이후락은 숨을 들이켰다. 없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 막고, 방해하고, 가능하면 설득하여 귀국시키는 방법 외에는 없다. 최선의 방법은 바로 김대중이 북한 요원에게 납치되어 베를린으로 떠나는 것이었는데 이쪽의 협조에도 불구하고 무산되었다. 그러고 나서 ‘한민통 사건’이 퍼지자 북한 측은 베를린행을 포기해버린 것 같다. 그들에게는 한민통이 김대중을 이용한 더 큰 성과일 터였다. 그때 박정희의 시선이 똑바로 이후락에게 옮겨졌다.
“이봐, 자네 부대 지휘해봤나?”
“네?”
되물었던 이후락의 얼굴이 금방 붉어졌다. 박정희의 말뜻을 안 것이다. 이후락은 전투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없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된 후에 정보국에서만 근무해왔다. 1961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후에 1963년,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어 1969년까지 육 년간을 박정희와 고락을 같이했다. 박정희가 말을 잇는다.
“내가 하나하나 지시를 해줘야 되나?”
집무실 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박종규도, 김정렴도 시선을 내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박정희가 탁자 위에 놓인 파일을 덮었다.
“답답한 사람이군.”
그것으로 회의는 끝났다. 김정렴과 박종규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이후락은 따라 일어섰다.
“응, 나야.”
김대중의 응답을 들은 이휘호가 서두르듯 묻는다.
“지금 어디세요?”
“일본이야. 미국에 갔다가 왔어. 그런데 집에 별일 없지? 애들 잘 있고?”
이쪽도 서두르며 묻다가 김대중이 곧 입을 다물었다. 그때 이휘호가 대답했다.
“여긴 별일 없으니까 걱정 말아요. 그런데 여비 다 떨어졌을 텐데…….”
“동지들이 도와주고 있어. 당신은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아휴.”
갑자기 이휘호가 커다랗게 숨을 뱉는 바람에 김대중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야?”
“아니, 당신 건강이나 잘 챙기시라고요. 다리는 어때요?”
“걸을 만은 해.”
“여기 소식 다 들으시지요?”
“여기선 한국에서보다 더 자세하게 듣고 볼 수가 있어.”
이휘호는 입을 다물었고 김대중의 말이 이어졌다.
“어쩔 수 없어. 내가 지금 돌아가면 대한민국에 희망이 없어져. 박 정권의 영구 집권에 굴복하는 모양새가 된다는 말여. 그러니까 당분간은 여그서 투쟁해야 되겄어.”
“언제까지요?”
이휘호가 낮게 물었으므로 김대중은 소리 죽여 숨을 뱉었다.
“희망이 보일 때까정.”
그러고는 덧붙였다.
“나도 처자식허고 따순 밥 먹으면서 적당허게 타협허고 살고 싶은 맘이 왜 없겄어? 허지만.”
어금니를 물었다 푼 김대중이 말을 맺는다.
“나까정 들어가뻔지먼 박정희 독재에 항거허는 동지들이 얼매나 실망허겄는가? 내가 동지들의 믿음을 배신허는 꼴이 될 것 같여.”
“아니, 여보.”
이휘호가 불렀을 때 김대중은 고여 있던 눈물을 손끝으로 닦고 나서 말했다.
“미안혀, 당신 고생시켜서. 못난 남편 만났다고 치부허고 애들 좀 부탁허네.”
보자기가 벗겨진 순간 김대중은 가슴 가득히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바다 냄새가 맡아졌다. 고향인 목포에서 매일 맡던 그 냄새다. 바다로 가는구나. 다시 양쪽 팔을 낀 사내들이 끌었으므로 김대중은 발을 떼었다. 구둣발에 밟히는 나무판자의 감촉이 느껴졌다. 배 갑판이다. 배에 오르면서 느꼈지만 사다리를 타고 꽤 높게 올랐는데 오백 톤 급은 넘는 것 같다. 배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 김대중이다. 이윽고 김대중은 자신이 선창 안으로 끌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좁은 계단을 내려가자 기름 냄새가 맡아졌다. 천장이 낮아서 이마가 나무 지름대에 부딪쳤으나 다음번에는 옆쪽 사내가 머리를 눌러 부딪치지 않게 조정했다.
“됐어. 여기 서.”
사내 하나가 말했으므로 김대중은 걸음을 멈췄다. 바닥은 다시 판자다. 그때 사내가 어깨를 눌렀다.
“앉아.”
김대중이 판자 바닥에 앉자 하나는 어깨를 누르고 또 하나는 눈에 붙여진 테이프를 천천히 떼면서 말했다.
“어이, 붕대하고 테이프 가져왔지?”
“응, 여기.”
뒤쪽에서 소리가 들린다.
“어, 시발. 꽉 붙었네.”
테이프를 떼어내면서 사내가 투덜거렸다. 살갗이 테이프에 붙어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김대중은 어금니를 물고 참았다. 붕대를 덮고 다시 테이프를 감으라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따뜻해진 느낌이 들고 있었던 것이다. 손톱만 한 관심도 이런 상황에서는 눈물겹도록 고맙다. 이윽고 테이프가 떼어졌으므로 김대중은 눈을 떴다. 그러나 천장의 전등 빛에 눈이 부셔서 눈만 깜박였다. 그때 옆에서 사내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어? 김대중 아녀?”
“어이구, 정말 김대중이네.”
옆쪽 사내도 당황한 것 같았다. 서둘러 붕대를 눈에 대더니 허둥거리며 그 위를 테이프로 감았다. 김대중은 입에도 테이프가 붙어 있었으므로 길게 콧숨을 뱉었다. 이 사람들은 선원인 것 같다. 자신을 알아본 그들의 놀란 목소리에 또 희망을 품었다가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것이 내 본연의 모습인 것 같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