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행은 떠날 때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이 더욱 기대된다. 가령 일본 교토를 다녀온 뒤에는 잘 살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생활을 허투루 대하지 말자고 다짐하게 된다. 이른 아침 집 앞을 비질하는 할머니의 부지런한 뒷모습을 보며 앞으로 뒤집어진 양말은 바로 돌려 세탁기에 넣자고, 소금에 절인 벚꽃을 올린 쌀밥, 미소국, 세 가지 반찬으로 차린 포근한 식사를 대접받은 뒤에는 귀찮더라도 반찬은 소담한 그릇에 덜어 먹자고 작은 결심을 세우는 것이다.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적어도 내 삶의 품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될 확률만큼은 높아진다. --- p.5
평소보다 스케줄이 많은 날에는 먼저 초콜릿부터 구입하는 습관이 있다. 가방에 넣어두었다가 연이은 회의와 미팅, 몇 건의 통화와 교통체증 사이마다 하나씩 꺼내 먹으면 기운이 나곤 했다. 그리고 어떤 기억은 초콜릿만큼이나 달고 강력해서 사는 데 때때로 도움이 된다. 무엇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 내일을 기약할 힘 정도는 얻을 수 있다. 나는 여행에서, 생활의 가장자리에서 그런 기억들을 알뜰살뜰 줍고 다닌다. --- p.24
지하철 2호선 열차 칸에 한강이 가득 차오를 때, 소나기가 그친 뒤 붉은 노을이 구름을 물들일 때, 바람에 부딪힌 잎사귀가 차르르 소리를 낼 때, 유모차에 탄 강아지와 나란히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릴 때. 고작 그런 이유로 가던 길을 멈추고 카메라를 꺼내 들거나 맑게 웃음 짓는 사람들이 나는 사랑스럽다. 그들은 자신과 지난한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는 방법을 알고 있다. --- p.25
여행을 하다 보면 그 도시만의 보폭을 감지할 때가 있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보폭을 지닌 도시, 바짓단을 스치며 뛰듯이 걷는 도시, 수시로 “미안합니다” 사과하게끔 만드는 빠듯한 보폭의 도시. 코펜하겐은 어떨까. 엘리베이터와 지하철, 공원과 카페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유모차 행렬을 바라보며 나는 ‘나란히’를 떠올렸다. 나란히 걷고 나란히 서는 사람들. 이들은 앞서고 뒤서는 데 도통 관심이 없는 천연덕스러운 보폭을 가졌을 것만 같다. --- p.29~30
비주기적으로 불면증을 앓는 나는 여행만 떠나면 어디서든 잘 자는 사람이 된다. 걸을 땐 주의 깊게 주변을 살피고, 먹을 땐 고독한 미식가처럼 오감을 발휘해 맛을 보고, 말할 땐 낯선 언어에 신중히 귀를 기울인다. 이렇게 어딘가에 종일 몰두한 날에는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뒤적이지 않고도 금세 까무룩 잠이 든다. 이런 상태를 보다 멋진 말로 표현한다면 바로 몰입이지 않을까. --- p.32~34
늘 궁금했다. 여유는 타고난 성격인 것일까. 노력한다면 누구나 여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여행책방을 오픈할 때 이름을 ‘일단멈춤’으로 지은 건 일종의 다짐이었다. 인생을 오선지에 옮겨 그렸을 때 구간마다 틈틈이 쉼표가 놓여 있길 바랐다. 하지만 걱정을 걱정하고, 앞당겨서 불안해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나로서는 그것마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속도를 내기 위해 근력을 키우듯 속도를 늦추는 데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버스나 지하철은 한 정거장 일찍 내려 걷고, 부족한 솜씨나마 천천히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 마셨다. 횡단보도의 점멸 신호가 깜빡일 때 무리해서 건너지 않는 것, 최단거리 대신 골목으로 에둘러 가는 것, 주말에는 업무 이메일을 가급적 확인하지도 보내지도 않는 것, 식빵을 토스터 대신 석쇠에 서서히 굽는 것 또한 노력의 연장선상이었다. --- p.51~52
가이드의 뒤만 쫓아다니다 너와 함께 걸을 수 있어 좋았다고, 공항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엄마는 말했다. 길을 헤매서 오히려 즐거웠다는 소감도 덧붙였다. 일본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구나, 알 수 있어 신기했단다. 1년만 더 일을 한 뒤 엄마는 조금 더 먼 곳으로 긴 여행을 가고 싶다고도 했다. “너는 어디가 제일 좋았니? 여행 많이 다녔잖아.” 프랑스도 좋고 이탈리아도 관광하기엔 괜찮지. “엄마 친구는 얼마 전에 아들이랑 배낭여행 갔다 왔다고 하더라. 그렇게 가면 패키지보다 훨 저렴하지?” 아무래도 그렇지. 내가 알아볼게. 나 그런 거 잘해. “저축도 좀 하고.” 응, 그래야지. --- p.65~66
어릴 때 텔레비전을 틀면 아프로펌을 한 화가 아저씨가 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좀처럼 잊기 어려운 그 이름은 밥 로스. 몇 번의 붓칠로 캔버스 위에 아름다운 설산과 호수, 뭉게구름을 탄생시키던 그는 방금 그려 넣은 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직 마르지 않은 그 부분을 다른 색 물감으로 휙 덮어버렸다. 그러고선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실수를 하지 않아요. 그저 즐거운 우연이 생기는 것뿐이죠.” 당시 열혈 시청자였던 나와 내 친구들이 화면 너머로 배운 것은 잘못 그려 넣은 직선에 좌절하는 대신, 그 직선을 나무 기둥으로 변신시키는 재치였으리라. 그리고 파리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그날, 나는 알 수 없는 어딘가로 홀리듯 이끌리는 신비로운 현상을 감히 여행이라 믿게 됐다. --- p.110~111
파리의 여름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을 만큼 낮이 길었다. 나는 늦잠과 낮잠 사이를 교묘히 오갔다. 한국의 시간표에 맞춰 설정해둔 알람은 이미 꺼둔 지 오래였다. 눈이 자연스럽게 떠질 때까지 기다렸고, 그렇게 나를 내버려두는 것만으로 묘한 해방감이 밀려 왔다. 파리에 온 뒤론 그저 기분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선택하거나 행동했다. 누구도 내게 이유를 묻지 않으니 나 역시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서 나는 ‘그냥’인 채 살았다. 그냥은, 어감도 귀엽다. --- p.112
혼자 속으로 좋아하는 영화가 있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그림이 있고 책이 있고 음악이 있다. 어디에도 알리고 싶지 않은 치기나 자기만족에 취한 허영은 아니었다. 그저 어떤 장면이나 스타일, 문장과 멜로디에 빠져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막연히 두려웠다. 타인의 평가가 기준점이던 시절 나는 스스로 입을 가로막곤 했다. 그러다 몇몇 친구를 만났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무렵, 우리는 하루 한 번 상영하는 독립영화를 보러 다니거나 정식 출판되지 않은 어떤 글들에 관해 대화했다. 친구들이 내가 찍은 첫 필름사진을 보며 감탄하고 가능성을 점쳐주던 날, 수업과제로 써 온 시를 읽고선 네게 이런 모습이 있는 줄 몰랐다는 고백을 해 오던 바로 그날, 나는 이전보다 아주 조금 어엿해졌다. 좋아하는 것을 망설임 없이 좋아할 수 있게 됐다. 거리낌 없이 당당하고 떳떳하게. --- p.147~148
어제와 같은 길을 걷는 오늘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했다면, 어제의 나는 몰랐던 사실을 오늘의 내가 깨달았다면, 그래서 일상의 시야가 한 뼘쯤 넓어졌다면 그것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 p.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