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클럽에서 폭력 집단에 이르기까지 일부 청소년들은 자기들만의 세계를 이루어, 거기에 들어가는 통과의례를 만들고 내부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정한다. 태어나고 자라난 환경에서 벗어나 스스로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은 유쾌한 도전이다. 그것을 통해 자아를 굳건히 다지고 사회적인 유대를 심화할 수도 있다. 그런데 캠벨의 견해에 따르면, 많은 경우 그들은 자기들만의 고립된 세계에 입문하는 것이지, 사회 일반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내부의 응집력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더 나아가 반사회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1부 「사춘기, 길 찾기의 어려움과 즐거움」, 43쪽)
이제 학교만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청소년들의 성장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해서 학교의 개념 자체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교육의 과업을 학교가 모두 떠맡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시민사회의 여러 주체들이 나서서 책임을 나누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세대, 삶의 영역, 전문 분야, 공간 등의 경계를 가로질러 배움의 인연을 맺으며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학습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학교 교육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입시 경쟁에 저당 잡힌 청소년들의 성장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기 준비라는 맥락에서 리모델링되어야 한다. 그래서 청소년기의 학습이 시간적으로는 대학 입시라는 목표 이상으로 확대되고, 공간적으로는 학교라는 제도적 울타리를 넘어 시민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1부 「공부, 지성이 자라나는 뿌듯함」, 69쪽)
상품 시장에서는 글로벌한 소비에 대한 환상을, 노동 시장에서는 글로벌한 경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20대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범지구적으로 확장되는 세계의 지평을 냉철하게 인식하면서 생활 세계를 탄탄하게 구성해가는 힘,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하면서 미래를 기획하고 변화를 주도하는 두뇌, 화폐 기준으로 당장 측정되지 않지만 장차 엄청난 가치로 발현될 문화의 씨앗을 발견하는 눈, 기존의 사회적 범주로 환원되지 않는 자기 삶의 고유한 뜻 그리고 타자의 시선에 매이지 않고 행복한 경험을 다양하게 창조할 수 있는 마음 같은 것이다. 성찰과 수행을 통해 그러한 자질을 습득해가는 과정이 곧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그것은 우선 젊은이들 스스로 달성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프로젝트만은 아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어릴 때부터 각개전투에 익숙해 있고 사회적 연대의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다. 젊은이들끼리 힘을 모으고 키우면서 사회의 기반을 창조해갈 수 있는 커뮤니티가 다양하게 출현해야 한다. (1부 「20대, 동지를 만나고 일거리를 만들고」, 97~98쪽)
30대에 설정한 인생의 지향과 얼개는 그 이후의 삶을 그리는 윤곽이 된다. 그 시기에 확보되는 사회적 적소와 네트워크도 꽤 꾸준하게 지속된다. 평생 이어갈 우정도 이 시기에 대충 걸러진다. 서로 상승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동지인지 여부를 검증하고 조율하는 기회와 장도 다양하게 열린다. 그만큼 인간관계의 쓴맛도 많이 본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타인과 세계에 대해 심각하게 고뇌하기도 하는 시기다. 그와 함께 자기 안에서 꿈틀거리는 이중인격도 발견하게 된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배신을 하고 음흉한 일을 꾸미는 악마의 얼굴을, 어느 날 문득 자화상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1부 「30대, 생애의 속살을 엿보다」, 114쪽)
연애가 주는 뿌듯함의 본질은 무엇일까? 현대인들은 자기가 살아 있다는 증거를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학교와 회사에서는 거대한 관료제에 갇혀 지내야 한다. 엄격한 규율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개개인은 통제와 조롱의 객체 또는 사무 처리와 평가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거기에서 마모된 자존감을 보상하는 영역이 바로 소비 세계다. 그러나 상품 미학의 코드와 규격 속에서 구매와 소유의 맥락을 떠나 자기를 실감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듯 스스로의 뜻대로 삶을 꾸리지 못하고 정체성이 희박해지는 시대에, 연애는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처럼 여겨진다. 명령과 위계의 경직된 질서를 벗어나, 자유롭게 표현하고 소통하는 해방구가 거기서 발견된다. 그 안에서 자신은 온전한 인격체로, 더 나아가 유일하고 특별한 사람으로 확인된다. 사랑은 그러한 상호 승인을 향한 열렬한 소통이다. (2부 「연애, 또 다른 행성으로의 모험」, 127~28쪽)
독신, 그것은 예찬이나 동경,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거니와 연민의 대상은 더욱 아니다. 싱글들은 저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저 고독이라는 인간의 궁극적인 실존을 좀더 자주 경험하는 것이고, 마음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화상을 오래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견뎌야 할 저마다의 외로움을 삶의 다양한 존재 가능성으로 고양하고 확장하려는 소망이 거기에 있다. (2부 「싱글, 마음과 대화하는 자유 시간」, 156쪽)
무한한 이윤 동기와 맹목적 권력 동기로 삭막해지기 쉬운 일상에서, 결혼식은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 축제는 살아 있음을 기뻐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승인하며 격려하는 만남이다. 소유와 지배에 휘둘리는 대신, 존재를 누리는 시공간이다. 다함없는 사랑으로 배필을 모시겠다는 신랑 신부의 서원 앞에서, 하객들은 마음의 옷깃을 여미며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그 웨딩 마치에 갈채를 보내면서 하늘 아래 인간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음에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상대방을 주인공으로 떠받들며 자기도 덩달아 정갈하고 고귀해진다. 결혼식은 그렇듯 인간의 긍지를 빚어내고 나눠 갖는 생의 향연이다. (2부 「결혼식, 경건한 어울림의 예악」, 173~74쪽)
자기 배반의 덫에 걸려들지 않고 삶의 절정을 맛볼 수는 없을까. 파멸의 위험을 떠안지 않고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스릴은 가능할까. 외도의 유혹은 희박한 존재감에 대한 각성일 수 있다. 불륜의 번민은 자신을 깊이 알아가면서 삶을 크게 배우는 공부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바깥의 길은 다시 안으로 향한다. 사랑의 본거지에 이르는 여정이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삶이냐』라는 책에서 ‘쾌락’과 구별되는 ‘기쁨’을 환기시키며, 그 핵심으로 ‘내적 탄생’을 역설했다. 매 순간 다시 태어나며 언제나 살아 있다는 느낌, 삶에 스며드는 희열과 자아의 신화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행복의 연금술사를 찾아 방황하는 우리에게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은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2부 「외도, 바깥의 길은 어디로」, 215쪽)
중년의 남성과 마찬가지로, 중년의 여성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삶을 아름답게 가꿔갈 자원과 실존의 공간이다. 갱년기란 무엇인가. 인생을 갱신하는 시기다. ‘폐경’ 대신 ‘완경’이라는 말도 나왔다. 육신은 분명히 노화에 접어들지만, 인생은 내리막길이 아니라 한 단계를 매듭짓고 새로운 무대로 나아가는 전환기라는 뜻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온 구차한 세월일지라도 당신은 그것으로 한 편의 서사시를 쓸 수 있다. 연극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에서처럼, 야속함으로 얼룩진 나날을 훌훌 털고 무변의 세계 앞에 서서 이 순간을 보듬어 안을 수 있다. 해풍을 가슴으로 끌어안으며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원대한 여생을 설계할 수 있다. 갈매기의 끼룩거림으로 살아 흔들리는 생, 그 주인공은 바로 당신 자신이므로. (3부 「중년 여성, 갱년을 어떻게 할까」, 268쪽)
삶과 죽음은 항상 함께 있다. 생명체는 그 자체로 늘 죽음을 내포하고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죽음을 향해 계속 달려가고 있다. 또한 살아 있는 사람들 주변에는 늘 죽은 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유품이나 묘소가 그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죽음을 멀리해왔다. 화장터나 납골당이 극도의 혐오 시설로 여겨지는 데서 알 수 있듯, 죽음은 매우 불길한 것이 되어버렸다. 가족 이외의 죽음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기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가족의 죽음도 가까이에서 접하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임종이 주로 병원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한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죽음은 실존이 아니라 인터넷 게임이나 영화 같은 가상현실에서 오락으로 경험된다. 그래서 늙음은 망각되고 자신의 죽음이 의식되지 못한다. (3부 「노년, 무를 향한 정진」, 309~10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