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세계든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그곳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듣지 못하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손짓과 표정과 몸짓으로 신호를 보낸다. (…) 나는 상대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고, 상대는 응시할 수밖에 없는 관계. 그 사이에서 언어와 관계의 윤리성을 배운다. 다큐에서 한창 김장 준비로 바쁜 엄마에게 불빛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아빠의 모습을 보았다. 소리 없는 세계는 목소리보다 다양한 손짓과 눈빛으로 다양한 언어를 창조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가 다중 세계에 살고 있다는 감각은, 신비롭고 어렵고 깊은 사유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중에서
우리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모욕감도, 외로움도, 박탈감도 아니다. 갑질에서 오는 모욕감도, 고시원 생활에서 오는 외로움도, 외지 발령에서 오는 박탈감도 궁극적으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견딜 수 있다. 오히려 ‘손해 보는 일’이야말로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이다. ‘손해 본다는 느낌’만큼 우리의 영혼을 뒤흔들며 증오와 분노에 휩싸이게 하는 것은 없다.
그렇게 보면, 자기 이익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가장 성행하는 신앙인 셈이다. 자기 이익은 인간 사이사이에 들어찬 반투과 유리막과 같다. 우리는 좀처럼 그 유리막 너머의 진짜 타자를 만날 수 없다. 아니, 굳이 그 타자를 보려고도, 만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명백하게도 타인에 대한 '실감'이 있었다」중에서
그날 커피숍에서 나의 선배는 누군가 한 사람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 들릴 듯 말 듯 작은 한숨만을 내뱉었던 우리는 그 이후에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를 그저 버티지 못한 나약한 인간, 잘못 선택한 인간 정도로 동정하는 데 그쳤을 뿐 자신이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대학에서 나올 때, 그리고 나왔을 때, 나를 비난하던 이들이 원망스럽지 않았다. 만약 다른 이가 ‘지방시’라는 글을 썼다면 나는 그를 비난하거나 외면하는 데 앞장섰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아이 이름을 ‘린’으로 지었다」중에서
“MB가 온대.”
“MB? 그 MB?”
“맞아. 경호원이 와서 30분 뒤에 도착한다고 했어.”
4인 한 상인 기본차림, 20인 분의 정식을 준비하라는 주문이 떨어졌다. 머리가 멍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용산 참사 5주기 추모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주말 알바를 하는 나는 그 자리에 가지 못했다. 그것도 모자라 MB의 밥상을 차려야 하다니. 그런 날, 참사의 최종 책임자일 수밖에 없는 이의 밥상을 차려 준 인권 활동가는 이 세상에 나 말고는 없을 것이다.
---「MB의 밥상을 세 번이나 차리며 ‘열심’을 추궁하다」중에서
그런데 인류는 언제부터 인간이 되었을까? 과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직립 보행하는 것을 인간으로 특징 삼고, 어떤 이는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 어떤 이는 놀이를, 또 어떤 이는 언어를 말한다. 문명적인 측면에서 인류에게 찾아온 가장 극적인 변화는 도구를 이용하게 된 것이라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인간이 죽음에 대해 최초로 자각하게 된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손에 넣은 가장 위대한 것」중에서
곁에 서 본 사람들은 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절박한지. 그 절박함에 숨이 막혀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잠시 머문 자리마저 고마워하는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리기는 쉽지 않다. 때론 그 삶을 이해하고 싶어진다. 같은 인간이 왜 이렇게까지 내몰리게 되었을까. 이런 질문들은 삶을 고민하게 한다. 나의 삶만이 아니라 너의 삶, 우리의 삶을.
---「곁에 선다는 것,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중에서
이토록 ‘진정성’이 부재한 시대에,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진정성이 사라진 시대에, 개별인들이 자신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지켜 내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 것인가. 오스카 와일드의 “너 자신이 되라(Be yourself)”는 선언은, ‘진정한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의 의미란 삶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묻는 일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진정성’의 실종 시대, ‘진정한 인간’으로 산다는 것」중에서
내가 지금 고집하면서 내 삶의 푯대로 삼고 있는 내 생각을 나는 갖고 태어났을까? 아니다. 그럼 내가 지금 고집하면서 내 삶의 나침반으로 삼고 있는 내 생각을 내가 창조했을까? 아니다. 그럼 내가 어제 고집했고 오늘 고집하며 내일 고집할 내 생각을 내가 선택했을까? 선택한 게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의 총량 중 그것은 지극히 미미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내가 갖고 태어나지 않았고, 내가 창조한 것도 아니고, 내가 선택한 것도 아주 미미한 생각을 우리는 고집하면서 살아간다. 회의도 없이!
---「‘사람’과 ‘괴물’ 그 사이, 회의하고 또 회의하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