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4년(신문왕 4) 10월, 저녁부터 새벽까지 계속해서 유성이 나타나는 현상이 관측되었다. 그 다음 달인 11월, 안승의 조카뻘[족자族子]되는 장군 대문(大文: 또는 실복悉伏)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그러자 남은 무리들이 신라 관리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왕은 군대를 보내 토벌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당주(幢主) 핍실(逼實)이 전사했다.
이때 활약했던 핍실과 관련된 이야기가 『삼국사기』 「열전」에 전해진다. 사량(沙梁) 출신 나마(奈麻) 취복(聚福)의 아들 취도(驟徒) 형제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성은 전하지 않지만 형제 셋의 이름은 남아 있다. 맏이는 부과(夫果), 가운데가 취도, 막내는 핍실(逼實)이다. 원래 취도는 출가하여 실제사(實際寺)에서 도옥(道玉)이라는 이름의 승려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태종무열왕 때 백제가 조천성(助川城)에서 신라군을 기습하여 싸우는데 전투가 결판나지 않자, “나는 모습만 승려일 뿐이니, 차라리 종군하여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편이 낫겠다”며 군복을 입고 이름을 취도로 고쳤다. 그렇게 해서 삼천당(三千幢)에 배속된 그는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 그리고 671년(문무왕 11) 문무왕이 백제 부흥 세력을 토벌할 때, 취도의 형 부과도 큰 공을 세우고 죽었다. --- p.9
『삼국사기』에는 혜공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장성하자 음악과 여자에 빠져 나돌아 다니며 절도 없이 놀았다는 비판이 나와 있다. 그 결과 기강이 문란해지며,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인심이 등을 돌려 나라가 불안해졌다는 것이다. (……)
그렇게 태어난 혜공왕은, 원래 여자의 천성을 가졌기 때문에 돌 때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여자의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몰아갔다. 그래서 8살에 왕위에 오른 후, 태후가 섭정에 나섰어도 정국이 수습이 되지 않아 도적 떼가 날뛰었다는 식이다. 이것이 표훈의 경고였고, 표훈 이후로는 신라에 성인이 나오지 않았다는 말까지 덧붙여놓았다.
혜공왕에 대해 이런 정도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점에서, 당시 귀족들이 경덕왕 때부터 혜공왕 때까지 이어져온 개혁 방향에 대단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불안은 정변으로 이어졌다.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로 쳐 들어온 것이다. 4월에 상대등 김양상이 이찬 김경신(金敬信)과 함께 김지정 등의 반란을 진압했으나, 그 와중에 왕과 왕비는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김양상 등은 시호를 혜공왕(惠恭王)이라 붙였다. --- p.75~76
애장왕을 살해한 언승(彦昇)이 헌덕왕(憲德王)이다. 그는 애장왕의 뒤를 이어 809년(헌덕왕 1)에 즉위했다. 소성왕의 친동생인 그는, 790년(원성왕 6)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와서 대아찬의 관등을 받았고, 791년(원성왕 7)에는 반란을 진압하며 잡찬이 되었다. 794년(원성왕 10)에 시중, 다음 해에 이찬 관등을 받아 재상 반열에 올랐다. 796년(원성왕 12)에 병부령이 되어 병권을 장악했고, 800년(애장왕 1)에 각간, 다음 해에 어룡성 사신(私臣)이 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상대등이 되며 거침없이 출셋길을 달렸다. 그랬으나 결국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 p.99
894년(진성여왕 8) 2월, 모처럼 기회를 잡은 최치원이 시무(時務) 10조를 올리자, 진성여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해서 최치원이 이후 신라 정국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열전」 ‘최치원 편’에도 “혼란한 세상을 만나 발이 묶이고 걸핏하면 허물을 뒤집어쓰니,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스스로 가슴 아파하여 다시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중원에 이름을 떨쳤던 최치원이 말년에는 사방을 방랑하며 노닐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래도 고려 태조 왕건은 그를 인정해주었으며, 고려가 세워진 후 그의 제자들을 많이 등용했다고 적었다. 이해 10월, 궁예가 600여 명을 거느리고 북원(北原)으로부터 하슬라(何瑟羅)에 들어갔다. 이때 궁예는 장군(將軍)을 자칭했으며, 895년(진성여왕 9) 8월에는 궁예가 저족군(猪足郡)과 성천군(?川郡)을 점령했다. 이어 한주(漢州) 소속의 부약(夫若)과 철원(鐵圓) 등 10여 군현도 수중에 넣었다. --- p.159
9월에 견훤이 고울부(高鬱府)에서 침공해 들어왔다. 경애왕은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왕건도 구원군 1만 명을 보냈지만, 견훤은 이 병력이 미처 도착하기 전인 11월에 신라 수도에 진입했다. 경애왕은 왕비와 궁녀 및 왕실의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있다가 견훤의 군대에 생포되었다. 이때 견훤은 경애왕을 핍박하여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제로 욕보였으며, 그 부하들을 풀어놓아 궁녀들을 욕보이며 약탈을 자행했다 한다. 그러고 난 다음 왕의 친족 동생[족제族弟]을 임시 왕으로 세웠다. --- p.173
935년(경순왕 9) 10월 경순왕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여겨, 왕건에게 항복하려 했다. 신하들의 의견도 갈렸고, 왕자는 반대였다. 그러나 경순왕은 “죄 없는 백성을 희생시킬 수 없다”며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보내 투항을 강행했다. 왕자는 울면서 왕에게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한다. 왕건은 다음 달인 11월, 대상(大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경순왕을 맞이하게 했다. 왕건은 경순왕에게 궁궐 동의 가장 좋은 집 한 채를 내려주고, 그에게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시집보냈다. 12월에는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으로 봉하여, 태자(太子)보다 높은 지위와 함께 봉록(俸祿) 1,000섬을 주었다. 그러면서 측근들도 고려에서 모두 등용해 썼고 신라(新羅)를 경주(慶州)로 고쳐 경순왕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 p.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