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 씨는 그때 20대 후반이었는데 아슬아슬한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삼삼해. 상어표 비키니 수영복이 미친 파장은 컸어. 여성 해방의 상징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서 반대파와 싸우는 일도 많았다니까. 그때부터 우리나라에서 ‘비키니’라는 말을 많이 썼지만, 사실 프랑스의 디자이너 레아(Louis Reard)가 비키니라는 새로운 수영복을 발표한 건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이었지. _13~14쪽
아파트는 한국인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렸어. 집을 가족과 사랑을 나누는 공간이 아닌 투자 개념으로 보는 분들이 많아. 하우스(House)가 주거 공간이라는 밋밋한 의미라면, 홈(Home)은 가정이라는 뜻을 강하게 담고 있어. 가족과 머무를 방 한 칸이면 모두가 행복했던 해방 직후의 그 시절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도 해. 그때의 집안 풍경이 정녕 ‘스위트 홈’이 아니었을까 싶어. _22~23쪽
혼수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어. 넓은 의미의 혼수는 신부가 신랑 측 친척에게 준비하는 예단, 신랑 측에서 준비하는 예물일 테고, 신부가 살림살이로 준비하는 것은 좁은 의미의 혼수겠지. 그런데 혼례 문화가 바뀌면서 과거엔 간소했던 예단이나 예물의 양이 늘어나고 품질도 고가품 위주로 바뀌었어._25쪽
구보 씨가 열 살 때 뭘 먹었는지 더듬어 생각해보니 보리밥과 짠지밖에 안 떠올라. 어린 나이에 조국 광복이나 해방이 뭔지나 알았겠어? 허기진 배를 채우면 그날은 땡잡은 거지. 보리개떡에 된장국, 소금에 절인 무짠지를 주로 먹었어. 감자나 옥수수도 자주 먹었어. 그래도 우리 집은 조금 형편이 나아 그나마 다행이었지. 하루 두 끼 먹은 친구들도 많았어. ‘물배’라는 말 들어봤어? 물로 배를 채운 거지. 미군정을 거쳐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됐지만 곧 6?25 전쟁이 일어났고 굶주림은 계속되었지. 전쟁 통에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음식 찌꺼기를 모아 끓인 꿀꿀이죽을 먹었어. 요즘 젊은이들은 입도 못 대겠지만 그 구수한 냄새를 지금도 잊을 수 없어. _30~31쪽
1970~1980년대엔 대학생들이 깡소주를 많이 마셨어. 때론 중국집에서 짬뽕 국물 하나 시켜놓고 ‘빼갈(배갈: 고량주)’을 마시며 시대의 울분을 토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깡소주’가 대세였지. 어두운 시대를 한탄하며 정치 문제를 안주 삼아 깡소주를 많이도 마셔댔어.
(중략) 1990년대 이후부터는 소주의 도수도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어. 맥주 마시는 사람들이 대폭 늘어났지. 생맥줏집이 번성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야. 맥주가 소주보다 더 부드럽게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늘어서였겠지._51쪽
1980년대를 거쳐 2000년대 초반까지는 꾸준히 운동회가 열린 것 같아. 구보 씨도 손자 녀석 운동회에 간혹 갔는데 대개 비슷비슷했어. 그런데 요즘은 운동회를 잘 안 한다고 해. 내용도 많이 달라져 기존의 일부 종목에 새로 추가한 것들이 많아.
(중략) 사실 운동회는 학생 가족은 물론 지역민 모두가 기다리던 공동체의 축제라는 성격이 강했어. 교장선생님, 면장, 지서장이 나란히 단상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부터 갓 쓴 할아버지까지 모두가 참여하는 축제였으니까. 학교 운동회는 학생들의 애국심을 환기하는 국가적 규율 장치로 활용된 때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역사회의 잔치 성격이 강한 집단 기억의 공간이었어. _62쪽
199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핵가족 시대가 정착되면서 추석의 의미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 2000년 이후엔 ‘역귀성’ 가족이 더 늘어났지. 자식들의 고생을 배려한 부모님이 자청하기보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역귀성을 권유하는 경우도 많았어. _67쪽
해방 이후 통신수단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가히 상전벽해(桑田碧海) 수준이야. 최근 신문에서 봤는데 우리나라의 스마트폰 사용자 수가 4,0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해. 아이에서 어른까지 안 쓰는 사람이 없는 거지. 뭐가 스마트(smart)인지 모르겠지만 전화기에 무슨 기능이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어. 사실 구보 씨 또래는 스마트폰이 불편할 때가 더 많아._94쪽
해방 이후 우리말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리말의 변천에 대해 알아보려고 해. 어떤 인터넷 커뮤니티에 게시된 ‘2016학년도 어른이 평가시험’이란 걸 봤는데, “신조어 몇 개까지 알고 있니?”라고 질문하며 27개의 낯선 단어를 나열했더라고. 복세편살, 별다줄, 핑프, 더럽, 세젤, 연서복, 걸크러쉬 등 구보 씨는 딱 하나밖에 못 맞혔으니 ‘어른이(어린이와 통하는 어른)’가 되긴 어렵겠네. (중략) 사실 언어의 변화는 그만큼 빠른 우리 사회의 변화를 말해주지. 언론과 방송에선 1990년대 말부터 제목과 자막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축약어를 썼어. 그와 동시에 인터넷 채팅이 발달하면서 축약어가 대폭 늘기 시작했어. 방송이나 온라인상에서도 이런 세태를 반영해 서로 다른 세대들이 즐겨 쓰는 단어의 뜻을 맞혀보는 프로그램들이 나오고 있어. 방송의 「알랑가몰라」 코너나 인터넷의 「그말모지?(mozi.it/word)」 같은 누리집이 아마 대표적일 거야. 구보 씨도 손녀가 ‘안 알랴(안 알려)’줬으면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을 거야. _102~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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