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북촌에 열광하고 있지만, 정작 누가 이런 동네를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비단 북촌만이 아니라 인근의 인사동, 혜화동, 성북동의 작은 한옥들, 그리고 서서히 빛을 내고 있는 종로 3가 뒤편의 익선동, 종묘 옆 봉익동 등 2000년대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 아담한 동네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20세기 초 한 명의 선각자와 그가 설립한 회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_4쪽
‘그’는 경성 전역(주로 종로 이북 조선인 거주 지역)에 작은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인 한옥집단지구를 건설했다. 조선인을 위한 주택을 조선인 회사가 건설해 조선인들이 살게 한 것이다. 1920년대 일제가 계획적으로 북촌 진출을 시도하면서 조선인들의 주거 공간을 위협할 때, 그의 대규모 한옥집단지구 개발은 조선인이 살 수 있는 집을 지어 조선인들의 주거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는 주택 부문의 물산장려운동이었고, 이를 통해 조선인의 북촌이 건재할 수 있었다. _4쪽
그는 성공한 부동산 디벨로퍼(토지를 매입해 건물을 개발하고 매도 또는 임대해 자본을 축적하는 사업가)이자 대자본가에 그치지 않았다.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를 후원하고 조선물산장려회의 실질적 성공을 이끌었다. 본인의 건물에 조선물산장려회 사무실과 전시관(상점)을 개설해 조선물산장려운동의 황금기를 열었고, 이후 조선어학회에도 회관과 토지를 기증하며 조선어사전 발간에 깊숙이 개입했다. 일제는 그의 민족주의 운동을 빌미 삼아 고문을 가하고 재산을 강탈했다. 그리고 그의 부는 시간과 함께 소멸되었고, 그에 대한 기억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_6쪽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인들의 거주 지역은 지속적으로 팽창한다.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 이후 당시 경성 남부 지역에 자리 잡았던 중국인 상권을 몰아내면서, 일본인들의 공간적 점유는 진고개를 넘어 남대문로 일대로 확장된다. 그리고 1896년 일본영사관이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로 이전하면서, 경성 남부 지역에서 일본인 세력은 더욱 공고해진다. 러일전쟁의 승리와 한일강제병합으로 마침내 조선에서 지도적 위치를 확보한 일제는 경성 남부 지역을 그들의 전용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1910년대 중반(1917년)에 이르러서는 본정(충무로), 대화정(필동)뿐 아니라 남대문로 1, 2, 3, 4가까지 대부분의 필지가 일본인 소유로 넘어가게 된다. _25쪽
그림 4에서 보듯이, 식민지 지배층인 일본인과 피지배층인 조선인 거주지는 공간적으로 명확히 분절되어 있었다. 청계천 이남 남촌 지역은 일본인, 그리고 청계천 이북 북촌 지역은 조선인에 의해 점유되어 분절되었다. 여기서 ‘북촌’은 현재 우리가 관습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삼청동, 가회동 일대가 아니라, 사대문 안 청계천, 종로 북쪽 지역을 뜻한다. _26쪽
조선계 디벨로퍼들은 일제 식민 치하에서 차별적 지위와 각종 제약과 난관 속에 부동산 개발과 운영이라는 새로운 산업을 일궈 냈다. 또 경제적으로 형편이 어려워진 왕실과 귀족층의 대규모 주택을 매입해 토지를 분필한 후, 근대적 한옥이라 불리는 기존과 다른 작은 규모(10~40평형대)의 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해 중산층 이하 서민계층의 주거 공급에 일익을 담당했다. _46쪽
일제시대 경성의 대자본가들은 ‘ 왕’이라는 타이틀로 불렸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화신백화점 소유주로 1930년대 조선 최대 갑부 소리를 들었던 박흥식이 있는데, 그는 ‘유통왕’이라 불렸다. 그에 필적할 만한 부를 축적한 인물에 ‘광산왕’이었던 최창학이 있다. 그리고 이들과 더불어 경성 3왕이라 불린 인물이 ‘건축왕’ 기농 정세권이다. 정세권은 한옥집단지구를 경성 전역에 걸쳐 건설하면서 단기간에 대자본가로 성장했다. _57~58쪽
“중류 이하의 계층을 위해 년부와 월부 판매제도를 강구한다”는 대목이 던지는 시사점은 매우 크다. 주택을 판매하는 디벨로퍼가 위험을 회피하고 수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판매대금을 일시에 받아서 이익을 즉각적으로 회수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년부와 월부로 받는다고 했다. 그것도 대상이 ‘중류 이하의 계층’ 즉, 중산층 이하 서민들이다. 북촌의 유명한 가회동 31번지를 건양사에서 개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건양사는 부유층을 위한 한옥집단지구도 건설했다. 그러나 그는 글에서 서민들을 위한 한옥을 건설하고 그들이 월부로 집을 구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한다고 밝히고 있다. 일종의 주택금융모기지를 민간회사인 건양사가 제공해 주택난을 덜어 주겠다는 의도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9억 원 이하 주택 구입 시 주택금융모기지를 제공하는 기관은 한국주택금융공사라는 공기업이다. 21세기 공기업에서 수행하는 일인데, 100년 전 경성의 디벨로퍼가 서민층의 주택난을 덜기 위해 자체 파이낸스 상품(월부상품)을 개발해 시장에 내놓았고 ‘다소의 공급’ 즉, 주택 공급을 늘려 주택난 해소에 일부 기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건양사의 자본력이 안정적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며 또 그 자본의 규모가 매우 크고 주택금융에 대한 노하우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_69쪽
정세권은 건양주택의 장점으로 위생적이고 실용적이고 경제적이라는 점을 들었다. 수도시설을 한옥 내부에 설치하고 부엌바닥에 타일을 깔거나 석탄 아궁이를 설치해 기존의 한옥이 가지고 있던 위생상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햇빛이 잘 드는 남쪽 면을 넓게 설계하고, 집 내부의 이동을 효율화하기 위해 방과 부엌 등의 공간을 위계를 고려해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식당, 세탁장, 하수구 등이 모두 물을 사용하는 주방에 인접해 사용이 편리했다. _91쪽
신문, 잡지에 나왔던 분양광고와 건양사 회사 주소지 그리고 가족의 증언과 등본상 주소를 역추적해 종합적으로 건양사의 개발지역을 지도화하면 다음 쪽 그림 15와 같다. 1920년대와 1930년대 건양사의 황금기 시절, 정세권의 개발 지역은 청계천 이북 대부분과 경성 외곽 지역(오늘날로 보면 교외 지역)에 걸쳐 넓게 분포한다. 물론 해당 지역 전체를 개발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경성의 대부분 지역을 커버하고 있다. 더군다나 광고와 가족의 등본상 주소에 나와 있지 않는 개발 지역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으므로 정세권의 개발 규모는 더 클 것이다. 건양사 경성 개발의 규모와 방식이 함의하는 도시개발·계획사적 의미는 필자의 견해로는 상당하다. 건양사의 사업 유형과 개발 방식은 미국 교외주택단지의 선구자인 레빗 사Levitt & Sons, Inc에 필적한다. _99~100쪽
제2차 세계대전의 파고 속에 남산주회도로 선상에 대규모 일본인 주거단지를 건설한다는 일제의 계획은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 만약 일제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왕십리 일대 토지를 대량 매입하고 왕십리와 보문동 일대의 일본인 주거단지 개발을 마무리했다면, 조선인들은 사대문 안 북촌 지역에 몰려 사는 형국이 되어 공간적으로 일본인 주거지가 조선인 주거지를 포위하는 양상이 될 수 있었다. 또 빈곤한 조선인들이 경성에서 더 먼 지역으로 쫓겨나고 있는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인 주거단지의 분절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정세권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왕십리 토지 전쟁’은 도시계획·개발사적 의미가 상당하다. _115~116쪽
그는 21세기 부동산 디벨로퍼들도 못하는 일을 이미 100년 전에 진행한 걸출한 대자본가였다. 건양사는 부동산과 관련한 모든 영역 토지 매수, 기획, 설계, 시공 그리고 금융 을 포괄했다. 건양사는 자기 자본을 바탕으로(당시 차별적 금융으로 조선인 디벨로퍼들은 은행 융자가 쉽지 않았다) 토지를 매입하고, 본인 회사 또는 방계 시공 협동조합들을 활용해 한옥집단지구를 건설했다. 주택 개량에 주안점을 두었기에 주택 개량에 힘써온 박길룡(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로 평가받는 인물)이 정세권 휘하에서 근무했고, 조선일보와는 공동으로 주택개량 공모사업(주택설계도안 현상모집)을 벌였다.
그 자신이 직접 주택 품질을 확인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새로 건축한 건물에 거주했다. 많게는 1년에 10여 차례나 이사를 다니곤 했다. 또 주택매입자금이 부족한 서민들을 위해 전월세를 낮춰서 받는 방식으로 주택금융을 직접 제공하기도 했다.
경기가 위축된 시기에는 분양 전략을 탈피해 대규모 주택 임대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기도 했는데, 2015년에 들어서야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이 분양시장 이외의 민간 임대주택 시장에 진출한 데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사업 전략은 시대를 한참 앞선 것이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