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의 첫 번째 속삭임: 어서와요, 여긴 당신을 위한 길이에요.
그러고 보니 여기 오기 전 나는 이토록 난처한 상황이 생길 거라고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춥고, 막막하고, 난감하고……. 나를 여기까지 여기까지 이끌었던 내 안의 낙천성은 하루를 채 보내기도 전에 와르르 무너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두려움과 후회가 순식간에 밀고 들어왔다. 카미노를 걷겠다는 계획 전체를 좌초시킬지 모를 그 감정들과 밤새 싸우며, 나는 카미노의 첫날을 알베르게 식당에서 뜬눈으로 맞이했다. --- 「알베르게 식당에서 보낸 악몽 같은 첫날밤」 중에서
이제 처음으로 내 몸에게 ‘너는 할 수 있어!’라고 신뢰를 주어야 할 때였다. 그러지 않는 한 이 길을 넘을 수 없었다. 이 순간 필요한 건 오직 내 자신에 대한 믿음 하나뿐이었다. 잠시 후 우리 앞에 중요한 이정표인 이파네타 교회Chapelle d’ibaneta가 나타났다. 이윽고 ‘정말 존재하는 곳일까’ 의심했던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순례자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댔고 사무실 직원은 ‘그래, 그럴 법도 하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아, 정말 론세스바예스가 이곳에 있었네! 우리는 제대로 찾아왔어! --- 「누가 내게 피레네를 넘으라고 했나」 중에서
그렇게 길을 걷노라니 지금껏 단 한 번도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5월에 한가로운 여행을 즐긴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교에 다니거나 회사에 다니거나 늘 어딘가에 매여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다른 직장을 구하지 못해 장기간 백수로 지낼까봐 늘 새 직장에 출근할 날짜를 정해놓고 그만두었기에 사회생활 18년 동안 내가 가진 휴가는 기껏해야 일년에 일주일 내외였다. 카미노에서 만난 외국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모두 깜짝 놀라 뒤로 넘어가는 제스처를 했다. --- 「하늘이 맺어준 친구, 안토니엘라」 중에서
인생은 아직 풀어보지 못한 선물상자 같은 것, 그 안에서 무엇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카미노는 그 상상하지 못했던 선물을 툭툭 던져주는 길이었다. 놀랍게도, 이날 오후 시주르메노를 향해 가면서 안토니엘라도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
“난 한 번도 다른 사람과 같이 카미노를 걸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 누구를 만난다고 해도 유럽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코리안 프렌드와 함께 걷다니!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야.” --- 「때론 목적지가 제 발로 다가온다」 중에서
카미노의 두 번째 속삭임: 당신의 꿈은 어디에 있나요?
어쩌면 내가 늘 원해왔던 건 바로 이런 조용한 평화였을지도 모른다. 즐거움이나 쾌락 이전에 존재하는 가장 고요한 상태. 무념무상의 상태. 니체는 ‘가장 침묵했던 순간이 가장 엄청난 경험’이 될 수 있다고 했던가. 그걸 평소에는 몰랐다. 그걸 모르고 나는 늘 적극적인 즐거움만 추구했다. 이런 평화야말로 가장 큰 기쁨이자 행복이라는 사실은 이곳에서 처음 깨달았다. --- 「벌판 위에서 만난 황금빛 기적」 중에서
나는 무조건 6월 11일에는 산티아고에서 비행기를 타야 한다. 최대한 천천히 카미노를 걸을 생각이라는 안토니엘라와는 입장이 다르다. 카미노 루트가 아닌, 산토 도밍고 데 실로스Santo domingo de silos에도 가야 한다. 부르고스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 모든 미사를 그레고리안 성가로 집전하는 성당이 있다는 산토 도밍고 데 실로스는 카미노를 준비하며 스페인 관광안내서를 보다가 알게 되었다. 단 몇 줄로 소개되었을 뿐이지만 왜 그랬는지 꼭 그곳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수사들이 부르는 아름다운 그레고리안 성가를 내 귀로 직접 듣고 싶었다. 언제 스페인에 다시 올지 모르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잖은가. --- 「당신의 꿈은 어디에 있는가? 죽기 전에 오늘을 살아라」 중에서
그런데 나와 전혀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같은 정서를 발견하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아, 사람은 다 비슷한 거로구나. 피부색이 다르고 성별이 달라도 사랑하고, 상처받고, 아파하는 건 다 똑같구나. 아무도 그냥 카미노에 오지는 않는다. 상처를 잊기 위해서든,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든,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해서든, 반드시 그 길에 오는 데엔 이유가 있다. ‘아름다운 풍경’ 운운했던 내게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낯선 길 위에 버려두고 싶은 것들이, 그걸 버린 뒤 채워오고 싶은 것들이 이곳에 있었기에 모든 걸 제쳐두고 달려왔을 것이다. --- 「6개 대륙에서 카미노로 모이는 이유」 중에서
카미노의 세 번째 속삭임: 때론 혼자서 가야 해요
슬픈 것도 서러운 것도 아니었다. 여자들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울 때가 있지 않은가.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고 참았던 것이 이런 때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울고 나니 마음이 씻은 듯 개운해졌다. 비로소 이곳에 와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싶었다. --- 「카미노를 벗어나 찾아간 그레고리안 성가의 마을」 중에서
이 낯선 이방인의 입에서 ‘성북동, 인천, 광주’라는 단어가 나왔다. 여기는 스페인 북부 지방의 버스터미널이다.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이 아니란 말이다. 성북동, 인천, 광주라는 단어는 이 공간에서 우리 두 사람만이 아는 암호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결례를 무릅쓰고 나는 계속 그의 정체를 물었고, 결국 그는 산토스Santos라는 이름의 가톨릭 신부이며 ‘한상도’라는 한국 이름이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 오래 일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 「“한국에서 오셨어요?”」 중에서
어느덧 나는 마을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걷는 것도 중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처럼 오랜만에 걸으면서 그냥 걷는 것에 취해버린 것이다. 탈진하기 전에는 멈출 수 없다. 춤추는 빨간 신을 신은 여자처럼, 나는 그야말로 춤추듯 걷고 있었다. 이틀 간 사용하지 못한 에너지가 풀가동되었다. 결국 나는 단 한 사람의 페레그리노도 없이 쓸쓸하고 음산한 길을 걸어 오후 5시가 넘어서야 폰세바돈Foncebadon에 도착했다. 무려 26.3킬로미터를 걸은 셈이었다. 피레네 산맥 등반 이후 최장거리였다. --- 「철저히 혼자가 되다」 중에서
빡빡이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얼큰이가 노래를 시작했다. 아직 해도 안 졌고,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거리 한복판 카페에서 그들은 시원스런 목청으로 아일랜드 노래를 불렀다. 빠르고 신이 나는 행진곡 풍 노래였다. 옆에 있던 다른 페레그리노들이 박수를 보내왔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멈춰서서 지켜보았다. (중략) 그 자리에서 나는 인연의 기묘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을 처음부터 몰랐다면 모를까, 그렇게 싫어하고 경계하던 사람들과 이런 방식으로 화해를 하게 될 줄이야. --- 「카미노의 악당들 2」 중에서
카미노의 마지막 속삭임: 당신 앞의 생을 믿어요
방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침대 위에 쓰러졌다. 다들 영광스럽고 행복하고 감격스럽게 산티아고 입성을 이야기하지만 내게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쉬고 싶은 생각뿐. 피곤했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피로가 일순간 몰려오는 듯했다. 더이상 아무것도 계획하거나 생각하거나 판단하고 싶지 않다는, 정신적 피로감. --- 「저기 산티아고 대성당이 보인다!」 중에서
그런데 출구 근처까지 걸어갔을 때 뒤에서 귀 익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배가 가라앉을 때 연주되었던 그 음악, 「주여 임하소서Nearer my god to thee」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중략)
“아무런 감동도 없었어. 난 산티아고에서 환영받지 못했어.”
내가 이런 심정으로 돌아갈까봐, 저 높은 곳에 있는 누군가가 내 마음을 이렇게, 따뜻한 손길로 달래주는 듯했다. --- 「산티아고에서 이틀을 보내다」 중에서
어쩌면 이 자리가 진정으로 카미노를 끝내는 자리이자 완성하는 자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더이상 아쉬움도, 후회도 없다. 산토스 신부님을 우연히 만난 건 그리고 기어이 이곳까지 온 건 바로 이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진정한 평화와 진정한 감사가 어떤 것인지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산토스 신부님은 나를 보낸 것이다. 그리고 나의 카미노는 이렇게 특별한 모습으로 완결되는 것이었다. --- 「내 카미노의 끝이자 완성이었던, 그 자리」 중에서
하필이면 9월 1일이라는 같은 날, 정확히 12년 후에 태어난 그녀와 12년 전에 태어났던 내가 이렇게 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건 아마도 카미노가 내게 전하는 메시지였으리라. 우연히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작되었던 내 카미노는 스페인을 떠나면서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기적은 그렇게 쉽게 끝나는 게 아니라고, 영원히 반복될 거라고, 카미노는 그렇게 내게 말하며 웃고 있었다.
--- 「기적의 론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