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게임의 개시
젊은 인도군 장교, 주재관, 탐험가, 측량사들이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을 종횡으로 누비며 고개와 사막의 지도를 그리고, 강의 발원을 찾아가고, 전략적 특징들을 기록하고, 포대가 통과할 수 있는 길을 관찰하고, 부족들의 언어와 관습을 연구하고, 통치자들의 신뢰와 우정을 얻으려 노력하게 되었다. 그들은 정치적 정보와 부족들의 뒷공론에 귀를 열어두었다. 어느 통치자가 어느 통치자와 전쟁을 벌일 계획인지, 누가 누구를 쓰러뜨리려고 음모를 꾸미는지 알아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경쟁하는 두 제국 사이에 놓인 거대한 무인 지대를 러시아가 잠식하는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확인하려고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이 알아낸 사실은 이런저런 방법으로 그들의 상관에게 전달되었고, 그것은 다시 그 위의 상관들에게 전달되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레이트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 pp.166~167
공포와 오해로 불붙은 그레이트 게임
등골이 오싹한 소식이 테헤란의 영국 공관에 전해졌다.…… 코널리와 스토다트가 둘 다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6월에 중앙아시아에서 영국의 평판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릴 때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부하라의 아미르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낸 친서에 답장을 받지 못한 데다가 이제 보복을 당할 걱정도 없다고 생각하자 잠깐 자유를 누리던 두 영국인을 잡아와 다시 감옥에 집어넣으라고 명령했다. 며칠 뒤 두 사람은 손이 묶인 채 감옥에서 끌려나와 아미르의 궁이 있는 아르크, 즉 성채 앞의 광장으로 끌려갔다.…… 군중이 말 없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영국인 장교는 자신들의 무덤을 파야 했다. 이어 그들은 무릎을 꿇고 죽음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스토다트 대령이 아미르의 압제를 큰 소리로 비난한 뒤 먼저 참수를 당했다.…… 코널리는 처형자를 위해 목을 길게 빼주었다. 잠시 후 그의 머리가 흙 위를 굴러 친구의 머리 옆에 놓였다.
그들의 잔혹한 처형 소식이 전해지자 공포의 물결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 --- pp.362~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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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러시아군이 콘스탄티노플이 이르면, 짐은 너무 수치스러워 즉시 양위를 할 것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디즈레일리에게 직접 그렇게 써 보내면서, 그에게 “담대하라”고 촉구했다. 여왕은 웨일스 공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그 혐오스러운 러시아인들과…… 싸우지 않고…… 어떤 협정이 계속될 것이라거나, 그들과 친구가 될 것이라고 믿지 마십시오! 그들은 늘 우리를 증오할 것이며, 우리는 결코 그들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대중은 쟁점을 제대로 이해하기는커녕 불가리아나 헤르체고비나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감정은 여왕과 비슷했다. --- p.483
적을 많이 학살할수록 평화가 오래 지속된다
투르크멘군은 러시아군이 갑자기 들이닥칠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또 폭발 때문에 아직도 정신이 멍했기 때문에 곧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진짜 학살이 시작되었다. 승자들은 전에 당한 패배를 복수했다. 아이 노인 가릴 것 없이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다.…… “온 땅이 주검으로 덮였다. 아기가 총검에 찔리거나 조각이 나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많은 여자들이 죽기 전에 강간을 당했다.” 스코벨레프의 허락을 받은 병사들은 대부분 술에 취해 사흘 동안 강간과 약탈, 학살을 저질렀다. 장군은 나중에 이런 행동을 다음과 같이 합리화했다. “적을 많이 학살할수록 평화도 오래 지속된다는 것이 나의 원칙이다. 세게 때릴수록 입을 다물고 있는 시간도 길어지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문제를 일으키는 이웃을 진압하는 데는 영국의 방법, 즉 로버츠가 카불에서 이용했던 방법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방법은 증오만 불러일으켰지 공포는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 pp.516~517
게임의 참여자와 희생자
양편의 선수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거의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들은 제국주의적 자신감이 최고조에 이르고, 애국주의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독교 문명이 다른 모든 문명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이 확고하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물론 인도인에게는 상의한 적도 없고 그들을 고려한 적도 없다. 그러나 인도 국경 너머의 이슬람 이웃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이 제국주의적 갈등에서 주로 피를 흘린 사람은 바로 인도인이었다. 그들이 늘 원하던 것은 그냥 내버려두어 달라는 것이었다. 인도인은 1947년 영국이 짐을 싸서 떠나자 그 목표를 이루었다. 그러나 다른 정복자에게 시달렸던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은 인도인만큼 운이 좋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방대한 러시아 제국이 100년 이상 유지되며 차르 시대 그레이트 게임 영웅들의 기념비 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이 제국은 1991년에야 전 세계적인 공산주의 붕괴와 더불어 무너져내렸다. --- pp.660~661
아프가니스탄, 다시 전쟁터가 되다
100년에 걸친 영러 대립의 진원지 노릇을 해온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유혈 사태가 거의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1979년 러시아는 자신의 꼭두각시 정부를 지원하려고 10만 병력을 들여보냈다. 그러나 십 년간의 극심한 갈등 뒤에 그들은 수모를 겪으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철수하면서 이전의 꼭두각시 대통령 나지불라 장군을 남겨두고 왔지만, 사 년 뒤 카불이 탈레반에게 항복하면서 나지불라도 몰락했다. 나지불라는 피난처로 삼았던 UN 구역에서 끌려나와 야만적으로 구타와 거세를 당하고, 공개 교수형에 처해졌다. 나지불라가 교수대에 매달려 있는 끔찍한 사진은 전 세계 신문의 일면을 장식했다. 나지불라가 이 『그레이트 게임』을 파슈토어로 번역하고 있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과거의 끔찍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모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러시아에 뒤이어 2001년에는 미국,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NATO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갔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비밀 알카에다 기지에서 서방을 목표로 한 9·11 유형의 공격이 다시 계획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촉발된 일이었다. --- pp.10~11
다시 세계 무대에 등장한 중앙아시아
‘새로운 그레이트 게임’의 가장 강력한 두 선수, 즉 미합중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의 풍부한 가스와 석유 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이 지역을 평화롭고 협조적인 상태로 유지하기를 바란다. 사실 세계 무대에서 러시아의 새로운 힘은 송유관을 자신들이 통제한다는 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신생 국가 중 어느 하나가 이란의 예를 따라 석유, 근본주의, 핵무기를 무모하게 뒤섞어 휘두를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워싱턴과 모스크바는 놀라 머리카락이 쭈뼛 설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 외에도 이 지역의 다른 강국, 특히 중국, 인도, 파키스탄은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곳을 유심히 살피며 우려를 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로 중앙아시아는 다시 역사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간 셈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곳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으며, 오직 용감하거나 어리석은 사람만이 미래를 예측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중앙아시아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뉴스의 한복판으로 돌아왔으며, 오랫동안 그 자리를 잃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 pp.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