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까지 차례가 왔다면, 아니, 자신을 내몰듯 떠밀었다면 이미 어떤 남자일지 어느 정도는 짐작을 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노련한 그녀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김경원 씨 되시죠?”
“네, 일 때문에 늦으셨다니 당연히 이해해드려야죠. 아…….”
“이제나입니다.”
이름도 모르고 나온 모양이구나.
아니, 그건 둘째치고 어지간히 이 자리에 나오기 싫었구나 싶어 웃으려다 말았다.
“제가 자리에는 앉아도 되는 거 맞나요?”
“물론이시죠. 세림아, 자리 좀 당겨줘. 아니, 조금 더 넓은 데로 옮겨야 하나?”
“그것도 좋겠네요.”
여자가 셋이다. 그녀가 왔으니 이제 넷이고.
상황 파악이야 천천히 하더라도 확실히 자리가 좁다.
“으흠…… 이제 다 모인 것 같은데.”
“김경원 씨, 이게 도대체 뭐하는 상황인가요?”
제나가 입을 떼기도 전, 앉아 있던 여자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남자는 싱긋이 웃는 인상 그대로다.
저절로 눈이 갈 만큼 잘생긴 남자. 그리고 직업적인 감을 발휘해보자면 제법 위험한 남자. 그 조화가 묘하게 어울려 옆에 앉은 여자가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바로 들렸다.
“음,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면.”
그녀도 사심 없이 귀를 기울였다. 차려입은 모양새나 분위기가 범상치 않은 것을 보니 그 여자의 말대로 한가닥 하는 사람은 맞는 모양인데 아직도 이게 어찌 된 일인지는 파악이 안 된다.
“선 보는 거죠, 경제적으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선 보라며 떠미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한 사람으로 통일해주면 나을 텐데 다들 입장이 다른지 그건 또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냥 한꺼번에 자리 마련했습니다만…… 마땅치 않으시다면 댁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하지요.”
말은 청산유수다. 도대체 저런 말은 누가 하나 싶어 얼굴을 보려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경원이 ‘너는 어쩌겠냐?’ 딱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자 제나는 예의를 갖춰 살짝 웃었다. 생각보다 손쉽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녀로서는 나쁘지 않다.
“저는 너무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런 경우가 세상에 어디에!”
“그러게요. 그렇지 않아, 오세림?”
능청스레 맞장구치던 경원이 옆에 앉은 세림을 찔렀다. 세림 역시 황당하고 분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 바닥에 한두 해도 아니고 이만한 남자가 없다는 것은 안다. 그는 돈에 인색하지 않고 사람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스폰서로는 최고의 조건이니 절대 놓칠 수 없어 그가 한 말을 되새겼다.
적당히 기죽이고 파투 놓으라고.
“아니요, 오빠. 저는 상관없는데…….”
“그럼 하지영 씨는요? 음…… 둘째 고모 소개로 오신 거 맞죠? 고모부가 KP 화학에 계시니 그쪽 라인이신가? 혹시 뭐 받기로 하고 여기 나왔어요? 웬만한 거면 제 선에서 해드릴 테니 넘어가주시면 좋을 텐데.”
그대로 고함이라도 치고 뺨이라도 날려주면 좋을 텐데, 하지영이라는 여자는 잠시 얼굴이 붉어지는 듯했다가 못 들은 체하는 것이 다였다. 처음에 파르르 따졌던, 그의 또 다른 친척 소개로 왔다는 여자 역시 같은 수순을 밟자 자연히 남은 것은 제나 하나다. 경원이 두 여자를 볼 때보다 조금 더 즐거운 빛을 띤 눈으로 자신을 떠보듯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시계나 한 번 보는 것이 다였다. 그러다 처음 왔을 때처럼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태도로 세림을 바라보았다.
“신기하네요. 연예인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네?”
“사람들이 왜 연예인 연예인 하는지 알겠네요. 그렇지 않아요?”
제나가 옆에 앉은 여자에게 동의를 구하듯 묻자 상대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가득 찼다. 지금 이 여자가 뭘 하자는 건가, 제정신이 맞는가, 여러 생각이 섞인 건지 대답조차 없었다.
“제 주위 사람이 알면 부러워하겠어요. 이렇게 오세림 씨도 보고.”
경원 역시 얼굴에서 살짝 웃음을 거두었다. 이모가 보낸 사람이 분명한데 이름을 들은 적이 없다. 뭐 하는 집 딸이고 그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 정도는 기억하지만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라 입을 다물었다.
으흠.
오밀조밀한 생김새다. 다른 말로는 여성스럽다. 조용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럴 것 같지는 않음을 확인했고 다음에 궁금한 것은 아무래도.
“……지금 뭐하시는 건지?”
제나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아무리 그라도 이 상황에서 여자가 이런 행동을 하리라곤 예측하지 못했다.
“제가 어제까지 야근을 했더니 좀 피곤해서요.”
“그럼 꼭 이 자리에 나오시지 않아도 되셨을 텐데.”
“사정이 있었거든요. 여기 계신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음…… 각자 사정이라는 게 다양하니까요.”
말꼬리에 달린 웃음은 세림을 향한 듯했다. 분한 표정의 세림이 당장에라도 일어설 듯 손을 바르르 떨자 그가 단호하게 고갯짓을 했다. 지금 세림이 나서면 재미가 없어진다. 숙련된 감이니 틀림없다.
“아직 해야 할 일도 남았구요. 저는 어떻게든 두 시간은 채워야 하는데 서로 머리채 잡고 하나가 남을 때까지 싸울 것도 아니고, 시간이야 각자 보내는 거죠. 먼저 가셔도 좋고……. 뭐, 싸우든 의논을 하시든 한 분 남으시면 그때 부르셔도 좋아요. 제가 지금 피곤해서 하나하나 싸울 여력이 없거든요.”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기어이 세림이 나서자 다른 여자들도 은근히 세림의 편을 들었다. 제나의 말처럼 울며 겨자 먹기로 이곳에 나왔지만 경원보다는 혼자 태연한 제나가 더 얄미운 듯 보였다.
“유감이네요, 오세림 씨. 저는 칭찬을 해드렸던 것 같은데.”
“누가 해달래요?”
“아니요. 그런데 저도 저한테 함부로 해도 된다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이 여자가?”
“……찌라시가 영 없는 소린 아니구나.”
노트북을 들여다보느라 세림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분해서 자리에서 일어난 세림 때문에 주위의 시선이 그들 테이블로 몰리자 세림은 곤란한 듯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남은 여자 둘도 잔을 세게 내려놓는 소심함 정도만 보이고는 연이어 자리를 떴고, 이내 그 커다란 테이블에는 제나가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밖에는 남지 않았다.
“…….”
여자 셋이 나갈 때까지 다리나 조금 들어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비켜주던 경원은 그대로 소파에 앉아 제나를 바라보았다.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났다.
“……두 시간 지났는데?”
“그런가요? 그럼 저도 이만 일어나야겠네요.”
“그런데 이것도 선이라면 선인데 통성명은 해야지 않을까요?”
“뭐하러요. 다시 볼 사이도 아닌데.”
노트북을 접고 다시 가방에 집어넣는 그녀의 손길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가만히 그 손을 지켜보던 경원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정식으로 다시 인사드리죠. 클럽 더 베이 사장 김경원입니다.”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인사를 안 할 수가 없다. 그건 사회생활의 기본 원칙이라 제나도 그 손을 무시하지는 못했다.
“서울지방경찰청 마약수사대 이제나 경위입니다. 오늘 덕분에 즐거운 경험 했네요.”
그녀의 소개를 듣던 경원의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다. 반면 제나는 조금 더 귀찮아졌다. 시간이야 때울 만큼 때웠고 나중에 이 이야기가 주선자들 귀까지 흘러간다 하더라도 자신이야 어긋나게 행동한 것이 없으니 당당했다. 이제 이 남자만 비켜주면 모든 게 잘 마무리될 텐데, 문제는 남자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저한테 더 볼일이 있으신지?”
“……글쎄요. 지금 생각 중이라.”
그가 고심하는 척하며 일부러 입구를 막았다. 몇 초 더 기다려보던 제나는 가방 안에서 진동을 느꼈다.
“비켜주지 않으셔서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서 전화 좀 받아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나가는 것만 아니라면. 관대한 척하던 경원이 다시 앉아 다리를 꼬았다.
“네……. 저예요. 아직 여기 있어요.”
누구랑 통화를 하는지는 감이 왔다. 그러면서 경원은 다시 생각했다.
이모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는지, 놓친 정보는 없는지 등등.
“아니요. 별일 없었어요. 나중에 물어보셔도 좋아요.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죠.”
상대방이 뭐라고 하는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곱지는 않다. 조금 얼굴을 찌푸린 채 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그녀가 그를 가늠하듯 미간을 좁히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떻긴요. 딱 말씀하셨던 그대로더라구요. 돈 많은 미친놈.”
잠시 양해를 구하듯 살짝 목례를 마친 그녀가 얼어붙은 경원의 다리를 한번에 건너뛰어 유유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