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나온 여행에서 나는 또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어딘가에 가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머리를 양쪽으로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쳐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줬다. 괜찮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기는 서울이 아니라고. 오롯이 너의 시간이라고.
--- p.24, 「일상을 떠나, 일상에 도착하는 여행」 중에서
예전 책에 ‘여기서 행복할 것’이라는 말을 써두었더니 누군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 ‘여행’이라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p.27, 「일상을 떠나, 일상에 도착하는 여행」 중에서
좋은 숙소는 중요하다. 좋은 식사만큼이나 여행에서 중요하다. 다만 좋은 숙소가 꼭 비싼 숙소는 아니다. 지금 내게 좋은 공간. 내가 편안해지는 공간. 샤워기는 좀 불편해도, 화장실이 좀 좁아도, 컵들은 하나같이 짝이 안 맞아도, 나무 바닥이 삐걱거려도, 매트리스가 좀 딱딱해도, 나에게 좋은 숙소란 나의 일상 같은 숙소였다. 완벽해 보이진 않지만, 내 몸을 구겨 넣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숙소. 지금 막 도착했지만, 며칠은 산 것처럼 순식간에 익숙해지는 숙소. 긴 하루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편안하게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숙소. 완벽하지 않더라도 내겐 완벽한 숙소. 수많은 집들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 집들에 도착하기 위해 다시 여행을 떠날지도 모르겠다고 종종 생각한다.
--- p.30, 「숙소와 여행」 중에서
별들을 지나쳐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관광객이 결코 찾아들 리 없는 동네 실비 집으로 들어갔다. 영어 메뉴판도 없는 곳에서 도박하는 심정으로 주문을 마치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마침내 블랙홀을 빠져나온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남의 은하수가 아니었다. 나만의 견고한 별 하나였다.
--- p.137, 「사랑스러운 결점으로 가득 찬 여행」 중에서
그 가운데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그 아저씨를 내가 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목적도 없고, 방향도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텅 빈 시간이었다. 문득 깨달았다. 아, 내가 이 순간을 정말로 그리워하겠구나. (…) 아무것도 아닌 이 카페가, 지금 이 기분이, 나른함이, 이 속도가, 저 멍한 시선이,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이 모든 무용한 시간이 그 무엇보다 그리워지는 순간이 오겠구나.
--- p.164, 「유용한 여행 무용한 여행」 중에서
오래 기다려 천천히 먹는다. 서로 이야기하고 웃는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은 맛있는 시간이다. 문득, 이렇게 살아야겠다 생각한다. 천천히. 음미하며. 같이. 여행이 아니더라도 순간순간을 천천히. 음미하며. 같이. 여행이 내게 일상의 리듬을 가르친다.
--- p.187, 「나의 무능한 여행 짝꿍」 중에서
우리 이야기에 빨갛게 상기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는 놀랐다. 정말로 자기가 가진 보석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이십 대의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던 표정. 작은 칭찬에도 화들짝 놀라고, 세상 그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가장 모자란 표정. 내게 그런 재능이 있을 리가 없다는 표정. 보석을 가득 안고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던 표정. 그런 표정을 그녀가 짓고 있었다.
--- p.216, 「청춘에 답장을 보내는 여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