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반다는 옹형귀(甕形鬼)라고도 합니다. 항아리 같은 모양을 하고 사람의 정기를 빨아 먹는 귀신이었지만, 불법에 귀의하여 남방 증장천왕 밑에서 선신이 된 팔부신중의 하나입니다. 『화엄경』에 있는 구반다왕이 읊은 게송 첫 대목을 소개합니다.
참는 힘을 성취한 세간의 도사
중생 위해 수행하기 한량없는 겁
세간의 교만한 집 길이 여의니
그러므로 그의 몸 가장 엄정해
여기서 말하는 ‘참는 힘’은 인욕심입니다. 보살의 육바라밀 중에도 인욕바라밀이 있습니다. 그래서 참아냄을 성취한 이를 일러 길을 인도해 주는 스승이라고 한 것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나의 길을 대신 갈 수 없습니다. 부처님도, 신도, 부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밥을 먹지 않으면 내 배가 부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이 드신다고 나의 배가 부르는 게 아닙니다. “신이시여! 저 대신 진지를 드시고 저는 배만 부르겠습니다.” 하는 것은 말도 안 되고 터무니없는 겁니다.
세상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줄 수는 없지만 길을 보여 주고 인도해 줄 수는 있습니다. 바로 스승, 도사가 그러합니다. “이쪽 길로 가면 네가 행복해진다. 이쪽 길로 가거라.” 하고 보여 주고 인도해 주고 이끌어 주는 이가 세간의 도사입니다. --- p.86~87
달은 모양에 따라서 보름달, 반달, 초승달, 그믐달 등으로 부릅니다. 이렇게 모양이 바뀌어도 달은 항상 크고 밝고 둥근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찌그러지거나 반쪽자리로 보인다 할지라도 달 자체가 찌그러지거나 반쪽이 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림자에 가려서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일종의 착시현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착시현상 속에서 보름달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특히 연초에는 대보름달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데서 보름달을 맞이하고 소원을 빌려고 산에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바로 월천자를 향해 소원을 비는 겁니다.
대보름달은 일 년에 딱 한 번 잠시 뜨고는 사라져 버립니다. 이때를 놓치면 다음 해 대보름날이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매일이 보름달 뜨는 날입니다. 나날이 보름달이고, 나날이 소원을 이루는 날입니다. 일 년에 하루만 대보름달이 뜬다고 여길 것인가, 아니면 매일 매일 보름달이 뜬다고 여기고 소원성취가 된다고 생각할 것인가는 자기가 선택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선택입니다. 행복을 미래의 목표로 삼아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을 유보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 p.91
우리는 몸과 마음, 그리고 성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성품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을 떠나서 성품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몸과 마음을 잘 쓰는 것이 바로 보살의 길입니다. 우리는 『금강경』을 통해 ‘몸뚱이니 음성이니 하는 것은 부처가 아니다.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변하는 것이다. 부질없는 것이며 허망한 것이다.’라고만 배우다 보니 몸과 마음을 소홀히 합니다. 몸과 마음을 떠나서 진리가, 부처가 따로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화엄경』에서는 몸과 마음을 떠나서 따로 진리를, 부처를 찾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게 있다고 한들 이 몸과 마음보다 더 중요한 게 또 뭐가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계신다고 한들 이 몸과 마음을 나 스스로 잘 선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 몸과 마음을 잘 갈무리하고 다스리고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 p.119~120
사람들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복된 윤회를 위해서만 안달복달을 합니다. 더 부자가 되고, 더 좋은 곳에 취업하고, 자식들 더 잘되기만을 바랍니다. 물론 이런 것은 인간 생활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財)?색(色)?식(食)?수(壽)?명(名)’에만 집착하게 되면 윤회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게 됩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길이 있듯이 윤회라는 것도 그러합니다. 오르내리기를 수없는 생 동안 거듭하게 됩니다.
우리가 참선, 염불, 간경 등 수행을 하는 이유는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해탈하기 위해서이지 복된 윤회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먹고 잘살고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함이어서는 안 됩니다.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복을 짓고 도를 닦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윤회에 보람이 있어집니다.
우리가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난 것은 생로병사의 고통스러운 윤회에서 해탈하기 위한 법을 공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복된 윤회만 바라고 산다면 이 세상에 온 보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재 동자와 같이 보리심을 내는 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 p.173~174
『화엄경』 「입법계품」에 등장하는 선지식은 보살 5명, 비구 5명, 비구니 1명, 장자 9명, 우바새 1명, 우바이 5명, 동남동녀 5명, 국왕 2명, 천신천녀 2명, 외도 1명, 바라문 2명, 선생 1명, 뱃사공 1명, 선인 2명, 불모 1명, 불비 1명, 제신 10명입니다. 선지식의 지위나 신분, 또는 직업이 매우 다양합니다. 신분과 계급의 차별, 빈부와 귀천의 차별, 승속의 차별, 남녀노소의 차별, 사상과 표현의 차별 등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선재 동자가 만난 선지식이 이렇게 다양한 것은 어디든지 선지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산에 있는 스님만 선지식인 것은 아닙니다. 스님은 물론이고 불교를 믿지 않는 외도까지도 선지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 p.195
세상의 모든 법이 환술처럼 머무는 이유는 인연으로 생긴 때문이며, 업과 번뇌로 생긴 때문이며, 무명과 애(愛) 따위로 생긴 때문이며, 망상 분별로 이룬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허깨비처럼 임시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알고 보면 삶이 그대로 판타지입니다. 그런데 판타지 영화에도 우울하거나 밝거나 기괴하거나 하는 여러 내용이 있듯 인생이라는 판타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왕이면 밝고 즐겁고 원하는 대로 되는 판타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남 탓을 하며 불평불만만 늘어놓으면 우울하고 침울하며 엑스트라 연기만 하다 죽고 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공이 되려면 삶이란 한 편의 판타지 영화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애착을 쉬게 되고, 애착을 쉬는 만큼 열심히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 p.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