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의 기습남침을 받은 육군본부 상황실은 전선의 예하부대로부터 적의 공격 상황을 접수하고, 육군총참모장 채병덕(蔡秉德) 소장에게 이를 보고했다. 채 총장은 지난 토요일 밤 육군회관 낙성식에 참석하고, 이날(6월 25일) 새벽 2시경 총장공관으로 돌아와 취침 중 오전 5시경 당직사령으로부터 상황 보고를 받았다. 그런 뒤에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육군본부 상황장교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 역임) 중위를 총장공관으로 불러 이를 확인한 다음, “전군에 비상을 발령하고 각 국장을 비상소집하라!”고 명령했다. 채병덕 총장으로부터 비상발령의 명령을 수령한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은 25일 오전 6시에 〈작전명령 제83호〉(1950년 6월 25일 오전 6시)에 의거 ‘전군(全軍) 비상령’을 하달하고, 동시에 육군 장병들의 비상소집을 실시했다.) 전날 육군회관 낙성식에 참석한 고급장교와 지휘관들은 밤늦은 회식에도 불구하고 비상소집이 발령되자 곧바로 출근하여 전쟁에 임했다. 그중 작전국장 장창국(張昌國) 대령이 며칠 전에 서대문 쪽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직통전화가 가설되지 않아 오전 9시쯤 가두방송을 듣고 뒤늦게 들어왔을 뿐이다. 그리고 오후 2시가 넘어서자, 외출·외박했던 장병들의 80~90퍼센트가 부대로 복귀했다. --- pp.17-18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에 계엄령 선포를 고려하고 있고, 국민에게 사실(남침 상황)을 알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당일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 수행에 필요한 긴급조치들을 실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의 효율성을 따져 전시 국정을 처리했다. 당시 정부 각 부처별로 전시에 필요한 긴급조치들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에게 부담을 주게 될 계엄령은 미군이 참전한 후에 실시했다.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일의 완급(緩急)과 일의 중요성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계엄령을 선포하면 육군본부와 육군총장이 주체가 되어 계엄업무를 시행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인력과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런데 당시 전선의 급박한 상황에서, 그리고 전쟁을 수행하기에도 벅찬 군의 입장에서 계엄령 선포에 따른 계엄업무는 전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실제로 1950년 7월 8일 계엄령이 선포되자, 7월 9일 육군본부는 계엄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예하부서로 민사부(民事部)를 설치했다. 이에 따라 헌병과 방첩대, 범죄수사대를 계엄사령부에 배속시켰고, 육군의 각 사단과 해군의 진해 통제부사령부에 민사과(民事課)를 두어 계엄업무를 수행했다. 그만큼 계엄업무에는 많은 인원과 노력, 그리고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 pp.36-37
무초 대사에게 전화 및 2차 회동 6월 25일 오후 10시~미정
이승만은 6월 25일 오후 10시에 무초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경무대에 들어오라고 했다. 이때 무초 대사는 미국대사관에 와 있던 신성모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과 함께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 경무대에는 이범석 전 국무총리가 있어 자리를 함께했다. 이른바 이승만·신성모·이범석·무초의 4자회담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발언은 주로 이승만 대통령과 무초 대사가 했다. 무초 대사는 그날 밤에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과의 회담 결과를 6월 25일 저녁 12시에 미 국무장관에게 전문으로 보고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왜, 이때 무초 대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경무대로 오라고 했을까? 이것이 이승만 대통령 특유의 압박 외교술인 ‘밀고 당기는 전법’이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워싱턴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른바 ‘충격요법’을 쓴 것이다. 마음에도 없는 서울 천도를 내비친 것이다. 미국이 과연 한국을 도울 마음이 있는지, 도우려면 빨리 도우라는 메시지가 담긴 고도의 ‘이승만식 압박 전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