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성도의 거룩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한다. 성도의 거룩함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2절) 이루어졌다. 이 교회의 구성원들이 전에는 음란한 도시의 시민이었고, 천한 지위에 속한 사람들이었고(1:26 이하), 말 못하는 우상을 섬기던 이방인이었고(12:2), 유대인이었지만(1:24),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거룩함을 위한 울타리다. 예수가 울타리이므로, 이제는 아무리 멀리 가도 예수를 이탈할 수 없는 자들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마땅히 “거룩한 자들”이라 불린다.
---「서론: 글의 시작(1:1-9)」중에서
풀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금 같은 작품을 내는 비결을 가르쳐주는 게 바로 세상의 지혜다. 그러나 이런 지혜는 성도에게는 알맞지 않은 것이다. 성도는 세상의 지혜를 따를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18절)라고 권면한다. 성도는 세상의 지혜에 대해 미련해져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지혜로운 자가”(18절) 된다.
---「분쟁의 소식(1:10-4:21)」중에서
이 전치사는 척도의 의미로서의 “엔”일 수 있다. 성도가 세상을 심판하게 된다는 능동자적인 의미뿐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성도를 기준치로 사용한다는 척도의 의미를 드러내는 전치사인 것이다. 성도는 세상 심판의 척도가 된다. 세상은 성도를 표준으로 하여 심판을 받는다. 물건으로 자를 재는 법은 없다. 그런데 성도가 세상 사람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면, 결국 물건으로 자를 재는 격이 되지 않는가?
---「음행의 소문(5:1-6:20)」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있지만 없는 것 같은” 역설적인 여러 모습의 삶이 나열된다. “하나님의 진격”에 대한 의식이 이 다양한 현재의 삶에 대한 다양한 역설을 가능케 한 것이다. 현재의 삶을 초월로 이끌고 간 것이다. “역사 너머”에 대한 인식이 역사 속의 현상적 삶을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역설의 상황에서도 초연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자신의 삶을 “그냥 지내는 것”(26절)으로 유지할 뿐 아니라, 정반대의 상태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된다.
---「바울의 답변1: 결혼과 부부 관계에 대해(7:1-40)」중에서
그의 “직임(사명)”은 주인에게 “강요”당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권리가 없다. 모든 것이 주인의 손에 달려 있다. 주인이 요구하면 행할 수밖에 없다. 바울은 주님에게 노예로서 강요당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랑도, 삯도 없다. 단지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할 뿐이다. 이러한 설명은 누가복음 17:10을 연상시킨다. 주인에게 철저히 수반 든 종은 마지막에,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바울의 답변2: 우상 제물과 그리스도인의 권리에 대해(8:1-11:34)」중에서
사랑이 있을 때 방언은 비로소 조화 있는 음악이 되며, 사랑이 있을 때 예언은 비로소 질서 있는 서가가 된다(13:1-2). 사랑은 모든 믿음의, 모든 소망의, 모든 인내의 총화다(13:7). 사랑은 인간을 온전케 하며, 사람을 성숙케 하며, 인생을 분명케 한다(13:9-12). 사랑에게서 믿음이 탄생하며, 사랑에게서 소망은 양육된다(13:13). 그러므로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그것은 사랑이다.
---「바울의 답변3: 신령한 것들에 대해(12:1-15:58)」중에서
스데바나의 집에는 아가야의 첫 열매라는 신분이 있고, 동시에 그에 걸맞은 목표와 가정적인 헌신이 있다. 다른 사람들과 동역을 하며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고하는 행실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스데바나 집의 권위가 있다. 이 권위 때문에 다른 성도들이 이 집의 지도에 따르는 것이다.
---「바울의 답변4: 연보와 그 외의 일에 대해(16:1-18)」중에서
이 편지는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1:1)이라는 말로 시작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로 끝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편지의 시작이며 종결이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종결할 수 없다.
---「결론: 글의 마지막(16:19-24)」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