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 쪽에서 파루스 등대로 가보았더니 등대의 한쪽 벽은 이미 무너져버렸다. 등대는 하늘 높이 솟은 방형건물로서 문은 지상에 나 있다. 문 앞에는 문높이의 건물 한 채가 있는데, 그 사이에는 나무판을 가로질러놓아 문으로 통하게 하였다. 나무판만 치우면 속수무책이다. 문 안에는 등대지기가 앉을 자리가 하나 잇고 등대 내부에는 방이 꽤 많다. 등대 내 통로의 너비는 9쉬브르이고, 벽 두께는 10쉬브르이며, 등대 네 변의 너비는 각각 140쉬브르에 달한다.
등대는 높은 언덕 위에 서 있는데, 시내까지의 거리는 1파르싸흐다. 등대는 삼면이 바다로 에워싸인 길쭉한 육지에 세워져 있고, 바다는 성벽에 잇닿아 있다. 그래서 육지에 있는 이 등대로가려면 시내 쪽에서 가야 한다. 등대와 연결된 지대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시의 전속 묘역이다. 750년(1349)에 내가 마그리브로 돌아가는 길에 이 등대에 다시 한번 들렀더니, 등대는 이미 폐허가 되어 들어갈 수도, 문까지 오를 수도 없었다. 나쉬르왕이 그 맞은편에 같은 모양의 등대를 세우려고 기공을 했으나 그의 사망으로 완공은 못했다.
이 도시의 기물괴상(奇物怪狀)의 하나가 시외에 있는 싸와리(al-sawari) 석주라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다. 이 석주는 대추야자수가 우거진 숲 한가운데 있는데, 나무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다. 석주는 정교하게 다듬은 통돌로서 굉장히 큰 방형석 평대 위에 놓여 이다. 도대체 그러한 석주가 어떻게 그곳에 세워졌는지 도무지 알길이 없고, 또 누가 세웠는지도 확인되 바가 없다.
(역주 53 : 싸와리 석주는 이집트 남부 아쓰완에서 채취한 자색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돌기둥으로서 높이 28.85m, 최대 직경이 2.628m, 무게가 약 550.492t이나 된다. 그리스어 명문이 새겨진 공적비로서 후기 로마시대에 쎄라피스(Serapis)신전 곁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역주 54 : 알렉산드리아의 싸와리 석주에 관해 이븐 주자이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여행을 다녀온 몇몇 샤이흐는 나에게 이야기 하기를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한 궁수가 활과 화살을 가지고 이 석주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붙박인 듯 앉아 있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다. 모두들 의아해했지만 그 꾀임수 내막을 알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가 무언가에 불안한 자가 아니면, 무엇인가 추구하는 자로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렇게 괴상한 짓을 한 것 같다. 그럼, 어떤 묘수를 써서 그 높은 데로 올라갔을가? 그는 한 끝이 단단한 끈과 연결된 긴 실을 화살에 매어 석주 꼭대기 너머로 쏘아 맞은편에 떨어지도록 하였다. 실이 석주 꼭대기에 걸치자 그 실을 당겨서 실에 연결된 끈이 바로 석주 꼭대기 한가운데 놓이도록 하고는 그 한끝을 한쪽 땅에 동여매었다. 그런 후 다른 쪽에서 줄을 타고 올라가서 꼭대기에 딱 틀고 앉았다. 그리고 나서는 끈을 치워버려 누구도 따라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의 이러한 깜짝수를 알 리가 없고, 모두들 신기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 pp 41~42
이븐 바투타가 미증유의 대탐험을 성공리에 단행할 수 있었던 또다른 요인은 세계에 관한 선배 아랍-무슬림들의 축적된 지식이다. 10세기를 전후한 이슬람 문명의 전성기에 많은 아랍-무슬림 학자와 여행가, 상인들은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현지 견문기 등 귀중한 기록들을 많이 남겨놓았다.
--- p.7
이 도시에서 나는 꾸드쓰로 향발하였다. 도중에 유니쓰(Yunis)-그에게 평화를- 의 묘소를 참배했는데, 거기에는 큰 건물과 사원이 함께 있었다. 그리고 예수 - 그에게 평화를 - 의 탄생지인 베들레헴도 방문하였다. 여기에는 야자수 그루터기가 아직 남아 있고 건물도 많다. 기독교인들은 이곳을 최대한 숭앙하며 내객도 반가히 맞이한다.
(역주 13 : 유니쓰에 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가 니누위(Ninuwi)에 있을 때, 동족들에게 우상숭배를 버리고 알라를 믿으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기에 그들과 헤어져서는 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그만 바다에 뛰어들었다. 마침 고래가 그를 삼켜버렸다. 그는 고래의 뱃속에서 알라의 영감을 받아 자신의 헛됨을 자성하고 알라께 구원을 기구하였다. 그러자 고래는 그를 뱃속에서 토해내 해안가에 내려놓았다. 그가 자기 부족에게로 돌아왔을 때 부족민들은 이미 이슬람교의 신자가 되어 있었다.)
(역주 7 : 이슬람에서는 예수('Iisa)를 하느님의 아들로 보지 않고 '마르얌의 아들('Iisa Ibn Maryam)'으로 보는데, 알라가 동정녀 마르얌에게 정령을 불어넣어 잉태 탄생케 하였다고 인정한다. 『꾸란』에서는 예수를 선지자(al-Nbi'), 사자(使者), 메시아(al-Masih), 알라의 노복('Abdu'l Lah) 등으로 칭한다. 특히 예수를 포함한 선지자들에 대한 믿음을 하나의 신조로 규정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에 관해서는 유태인들이 그 자신을 직접 십자가에 매달아죽인 것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사람을 대사(代死)시켰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알라가 선지자인 그를 곁으로 불러올렸다고 믿는다.
--- pp 101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 가운데는 법관이며 언어학자인 아마둣 딘 알 칸디가 있다. 그는 보통사람들과는 달리 유별난 터번(이마마)을 쓰고 있다. 나는 동서양 어디서도 그렇게 큰 터번을 본 적이 없다. 하루는 미흐라브 앞에 앉아 있는 그를 보았는데, 그가 쓴 터번이 어찌나 크던지 미흐라브를 거의 다 꽉 채우고 있었다.
(주석 60 : 터번은 아랍어로 '이마마(imamah)'라고 하는데, 아랍인들이 착용하는 일종의 머릿수건이다. 보통은 모자를 쓰고 그 위에 감아서 땀을 닦는 역할을 한다. 감는 모양은 여러가지며, 흔히 종파나 가문, 왕조나 직능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 예컨대, 압바쓰조 때는 검정색, 파튀미야조 때는 흰색, 교조 무함마드의 후손들은 붉은 색 이마마를 착용했다. 이마마를 두른 사람을 '무암맘(mu'mmam)이라고 하는데, 근자에는 전통보수의 상징처럼 되고 있다.)
(역주 61 : 미흐라브(mihrab)란 이슬람 사원의 예배실에서 메카를 향한 벽에 뚫은 벽감(壁龕)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아치형이며 자재와 단장에 신경을 쓴다. 예배 때 이맘이 바로 그 앞에 서서 예배를 인도한다. 초기에는 메카 방향표시로 나무판을 세워놓고 예배를 하다가 8세기초 메디나 아미르 오마르 이븐 압둘 아지즈가 성사(聖寺, 즉 교조 무함마드사) 내 예배실 벽을 뚫어 방향표시를 한 때부터 벽감 형식을 취했다.)
--- pp 46
다마스쿠스의 종교기금은 그 종류와 지출이 너무 번다하여 도대체 얼마인지 헤아릴 수가 없다. 그중에는 세민(細民)들이 걸어서 성지순례를 하는데 필요한 비용기금, 가정형편이 어려워 부담할 수 없는 신부의 출가비 보조기금, 포로 속금(贖金) 보조기금, 여행자들이 고향에 돌아갈 때까지의 의식비와 여비의 보조기금, 심지어 양켠에 인도가 있고 그 사이를 거마(車馬)가 지나가도록 되어 있는 시내의 좁은 길 보수기금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외에도 여러가지 자선기금이 있다.
어느날 나는 다마스쿠스의 한 골목에서 한 머슴애를 만났다. 그는 들고 있던 솨한(sahan)이라고 부르는 자기접시를 그만 손에서 떨구어 깨뜨려버렸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중 한 사람이 이 어린이에게 "깨진 조각을 주워모아서 그릇 보조기금 관리인에게 가지고 가라"라고 타일렀다. 그리곤 그애와 함께 관리인에게 가서 접시 조각들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관리인은 별 군말 없이 그만한 접시를 살 수 있는 돈을 선뜻 내주는 것이었다. 참, 이것이야말로 일종의 선행이 아닐 수 없다. 머슴애가 접시르 깨뜨렸으니 주인은 필히 그애를 때리거나 호되게 꾸짖을 것은 뻔하다. 그러면 애는 또 애대로 상심하거나 변심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러한 보조 기금은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하나의 양약이다.
--- pp 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