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바라보며 그분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지혜’의 교사인 동시에 살아 있는 지혜의 가장 탁월한 구현이라고 간주했다는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된다. 그분은 들에 핀 풀 한 포기에서부터 사람들의 내면까지, 모든 것에 대한 풍성한 지식을 그려내 보여주셨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신 현현이며 신선한 계시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도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선언하셨고, 또한 그 나라를 시작하셨다.
---「서문」중에서
바울은 여기서 중대한 구분선을 그린다. 이 내용은 그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설명하고자 했던 핵심 사항 중 하나다. 세상 역사는 두 ‘시대’ 혹은 ‘세대’로 나뉜다. 먼저 인간의 반역, 타락, 절망, 죽음을 그 특징으로 하는 기간인 ‘현시대’(present age)가 있다. 이어서 ‘오는 시대’(the age to come), 즉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서 이 세상 전체를 다스리는 왕이 되셔서, 그분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의 통치를 끝장낼 시대가 온다. 중요한 것은 이 ‘오는 시대’가 이미 메시아 예수 안에서 현시대로 침투해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라는 위대한 오케스트라에서 결정적인 전조부로서, 이 순간을 기점으로 단조의 선율에서 장조의 선율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 p.19
그렇다면 우리 앞에는 두 종류의 지혜가 있는 셈이다. 이 내용은 오늘날에도 의미심장한 이야기다. 오늘날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은 그들의 국가가 운영되는 방식에, 그리고 그들의 경찰 권력이 움직이는 방식에, 그리고 세계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진저리가 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종종 이러한 비판들은 너무나 정당하며, 틀림없이 야고보 당시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던져진 도전은 그 이상이다. 그들은 현 세상의 방식을 향해, 그리고 악한 사람들의 행동 방식을 향해서 진리를 내세울 수 있어야 하지만, 그 말이 끊임없이 푸념을 늘어놓는 식이어서는 안 되며, 특히 자신이 가진 ‘지혜’의 모양새가 기껏해야 모든 사람과 모든 사안을 향해 비수를 꽂는 말을 찾아내는 능력인 사람이 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여전히 이 세상에는 아름다움과 사랑, 자비와 순전한 선이 풍성하게 존재한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기뻐할 뿐만 아니라 이 사실에 기여해야 한다. 옛말에도 있듯이, 어둠을 저주하기보다는 촛대에 불을 붙이는 게 더 현명한 처사다. --- p.38
기쁜 소식은, 당신이 메시아에게 속했다면 이미 그 새로운 세계에도 속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이 새로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간절히 일깨워 주고자 했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에게 해당하는 어떤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들과 메시아는 서로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바울은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은 기초 원리로 정리한다. ‘메시아에게 해당되는 내용은 그들에게도 해당된다.’ 물론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당장은 진짜라고 느껴지지 않는 내용을 믿는 법을 배우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에서 필수 요소다. 그것은 마치 목적지와 정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았던 시간이 실은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게 바로 믿음의 삶이다.
--- p.60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 이 구절을, 요한복음의 웅장한 서문을 마무리하는 진술(요한복음 1:18)과 나란히 두고 비교해보자.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독생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하게 가까우신 그가, 아버지를 세상에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 진술의 의미는 충격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길이 없지만, 예수를 바라보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된다. 이제 이 구절, 요한1서 4:12의 의미를 보자. 즉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길이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실체를 봄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 모습을 봄으로써 알게 된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결정적으로 시작하신 그 일을,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해서 완성하기 원하신다. 아직 준비가 안 된 당황한 세상 앞에 예수가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주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90)
신명기는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 내부에서도 ‘독초와 쓴 뿌리가 생겨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때때로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교회나 친교 모임에서도 불만이 생길 수 있다. 불만은 교리 문제 혹은 윤리 문제에 관한 의견 차이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 문제는 정말로 중요한 내용일 수도 있지만, 종종 개인적인 주장을 설파하기 위한 연막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는 늘 동반되는 표시가 있으니 바로 무언가 쓴맛이다. 기도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의견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쓴맛은 뒤따르지 않는다. 혹시 괴롭고 해로운 쓴맛이 감지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지해야 한다. 외적으로는 공동체의 구성원이지만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에 완전히 마음을 열지 않은 사람의 경우, 그 자신과 공동체를 수치스럽게 만들 말과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 에서처럼 그들에게도 제정신이 아닌 순간이 닥쳐서 새로운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일단 그런 일이 일어나면 원래 상태로 돌이키기 어렵다.
--- p.121
바울의 큰 그림 속에서 이 신음은 창조세계 전체라는 지도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특출한 본문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바울이 희망을 묘사하는 이미지 가운데 가장 생생한 이미지를 만난다. 그것은 산통의 이미지다. 창조세계 전체가 진통을 하면서, 하나님의 새 세계가 태어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교회는 그 고통과 그 소망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교회는 세상의 고통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세상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기도하며 함께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 가운데 하나이며, 새 창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우리가 맡은 고귀한, 하지만 낯선 역할이다.
--- p.139
핵심을 전달하는 것은 바로 이 다양한 측면과 다양한 색채와 다양한 아름다움을 가진 교회의 정체성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즉 일곱 가지 무지개 색깔을 발산하며 반짝거리는, 수많은 면을 지닌 다이아몬드와 같다. 반면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지상의 권세자들과, 그에 대응하는, 어둠에 가려진 천상의 존재들 모두)은 언제나 그들 자신의 생기 없고 지루한 이미지를 따라 사회와 사회 구조들 역시도 단조롭고 획일적이며 일차원적으로 창조하는 경향이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세운 편협한 테두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소외시키거나 없애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처럼 하나 된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향하여 그들의 시대가 이제 끝났다고 경고하는 셈이며, 이 세상을 향하여 인간이 되는 전혀 다른 길이 존재한다고 선언하는 셈이다.
--- p.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