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是非). 옳음과 그름 혹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말다툼을 뜻합니다. 해 일(日) 밑에 바를 정(正) 자를 옆으로 펼쳐놓은 게 옳을 시(是)라는 글자입니다. 봄이면 천지가 상쾌하게 맑은 공기로 가득 찬다는, 청명(淸明)이라는 절기가 있습니다. 보통은 4월 5~6일 즈음이라 저는 그때가 되면 성묘도 하고, 나무도 심고 그래왔습니다. 1년은 24개 절기(節氣)로 나뉘는데, 그 절기를 구분하는 경계이자 기준이 바로 태양의 움직임입니다. 해가 뜨고 지는 일, 계절의 변화, 낮과 밤, 이런 게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는 데서 유래한 시(是)는 ‘옳다’, ‘바르다’, ‘어긋남이 없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아닐 비(非)라는 글자는 새가 양날개로 날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두 날개가 등을 대고 반대편을 향하고 있어서 ‘등지다’, ‘그르다’, ‘틀리다’, ‘아니다’, 나아가서는 ‘비방(誹謗)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 사이 관계가 틀어지거나 어떤 현상을 볼 때, 논쟁을 넘어 언쟁이 되거나, 그래서 의절하거나 영영 안 보는 사이가 되는 경우가 바로 시비를 따질 때입니다. ‘나는 옳고 당신은 그르고, 내 말은 맞고 네 말은 틀리다.’ 한 걸음도 양보 없는 이런 고집, 아집 때문에 관계가 어긋나고 상처를 받기 십상입니다.
---「1장. 봄」중에서
나와 다른 누군가의 삶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 말이나 입장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역지사지’의 뜻을 살펴보면 좋을 것입니다. ‘역지사지 (易地思之)’에서 주목할 글자는 바꿀 역(易)입니다. 역(易)의 아랫부분인 말 물(勿)의 갑골문에는 비밀이 감춰져 있습니다. 그릇을 기울여 담겨 있는 무언가를 쏟아내고 거기에 새로운 것을 담는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이게 바로 역지사지의 바탕입니다. 바꿀 역, 쉬울 이로 읽히는 이 글자(易)가 나아가서는 ‘고치다, 새로워지다, 평안하다, 편안하다, 기쁘다, 기뻐하다’는 뜻을 품고 있다고 합니다.
땅 지(地)는 내가 딛고 있는 땅, 처지, 형편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생각 사(思)는 뇌(腦)를 상징하는 밭 전(田)과 마음 심(心)을 합한 글자로 ‘머리와 가슴으로 깊이 생각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갈 지(之) 는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나타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자원(字源)에 따라 풀어보겠습니다. ‘내 그릇을 비우고, 상대 마음과 생각을 새로 담으면, 나와 당신이 기쁘고 편안해진다.’
역지사지는 내가 원래 갖고 있던 당신에 대한 오해나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고집이나 아집을 비우고, 상대의 마음과 생각을 새로 담는 것입니다. 맑고 깨끗해진 내 그릇에 새로 담으면 나와 당신 이 기쁘고 편안해진다는 것이 바로 역지사지의 깊은 뜻이 아닐까요.
---「2장. 여름」중에서
‘먹방’, ‘쿡(Cook)방’이 개인방송 채널까지 대세로 자리 잡은 지 벌써 여러 해입니다. 더욱이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어느 때보다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면서 의식주(衣食住)가 아닌 ‘식의주(食衣住)’ 시대가 왔나 봅니다. 다종다양한 요리 방송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식재료가 바로 ‘묵은지’입니다. 오랫동안 숙성하여 푹 익은 김장김치를 일컫는 묵은지. 요리에 재능과 관심이 없거나 요리할 시간이 없는 사람에게는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질 운명이기 십상입니다. 발효음식 특유의 역한 군내와 물컹한 식감까지, 김치냉장고 속 골칫거리에 불과하니까요. 그래도 하얀 곰팡이가 다닥다닥 피어올라 도저히 못 먹을 것 같은 묵은지 한 포기도 버리지 않고 흐르는 물에 몇 번이고 빨아서 김치만 두로, 비지찌개로 새롭게 만들어주시던 우리 할머니. 거북이 등가죽처럼 거친 손으로 맛난 음식을 뚝딱 해주시던 돌아가신 할머니가 문득 그립습니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묵은지라도 그 감별 기준은 버릴 것인가 쓸 것인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먹을 것인가, 아니면 속을 털어내고 깨끗이 빨아서 먹을 것인가 이 두 가지였습니다. 취사선택이 아니라 ‘버리지 않고 어떻게 잘 쓸 것인가’였습니다.
필자는 가끔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묻곤 합니다. ‘나는 그동안 좋은 것, 쉽고 편한 것, 화려한 것만 취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함부로 대 하거나 버렸던 것은 아닐까?’, ‘살림살이를 한다는 주부가 정작 살리 는 일이 아닌 버리는 일, 죽이는 일을 거리낌없이 해왔던 것은 아닐까?’, ‘낡았다고, 싫증났다고 홀대했던 것은 아닐까?’하고 말입니다. ‘나이 듦’, ‘늙음’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던 것은 아닌지 자꾸 부끄러워집니다.
---「3장. 가을」중에서
화는 오로지 내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말은 내가 화를 만들 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화가 났을 때 화내지 않고 꾹 참는 것은 좋은 것일까요? 가족이나 친구, 곁에 있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니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화를 참는 것은 화를 내는 것과 똑같은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 독기(毒氣)와 살기(殺氣)가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가 언젠가는 남에게 폭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참기보다는 잘 달래야 합니다.
화는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반쯤 미쳐 있는 상태입니다. 제정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화는 손님, 객식구입니다. 손님은 잘 대접하고 고이 보내야 하듯, ‘객기(客氣)’인 화도 잘 달래고 풀어줘서 보내야 합니다. 손님을 보내고 ‘정기(精氣)’인 나 자신으로 돌아와 주인 노릇을 해야 합니다. 화는 캔에 든 콜라와 같습니다. 당장의 조갈(燥渴)은 해소하겠지만, 좀 있으면 또 목이 마릅니다. 쏟으면 얼룩이 지고, 흔들면 폭발합니다. 정기는 맑은 물과 같습니다. 갈증 해소는 물론 쏟아도 흔적이 남 지 않습니다. 화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는 마음의 주인이 아니라 화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화가 내 마음의 주인 행세를 하게끔 내 버려두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4장. 겨울」중에서
‘감사(感謝)’는 고맙게 여기는 마음을 뜻합니다.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감사입니다. 우리말 ‘고맙습니다’도 앞에서 필자가 풀이 한 것처럼 당신은 ‘고마(신을 뜻하는 옛말)’와 같이 귀한 존재라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감사와 고마움은 내 앞에 있는 존재를 하늘과 같이, 신과 같이 귀하게 여기고 존경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히스이 고타로의 《하루 한 줄 행복》을 보면 일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고 일본을 대표하는 말로 ‘이타다키마스(いただきます, 잘 먹겠습니다)’와 ‘고치소사마(ごちそうさま, 잘 먹었습니다)’를 꼽는다고 합니다. ‘이타다키마스’는 ‘하늘과 땅의 은총을 젓가락을 높이 들어 받겠습니다’를 줄인 말로, 나를 위해 생명을 내준 식재료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합니다. 사실 밥 한 그릇만 해도 씨 뿌리고 키운 농부의 정성, 비와 햇볕과 바람으로 함께 한 하늘의 정성, 탈곡과 정미, 유통 그리고 깨끗이 씻어 밥을 한 정성까지 긴 여정을 거쳐 상에 오르지 않습니까. ‘고치소사마’는 일본식 한자로 ‘ご馳走?’인데, ‘馳走’는 둘 다 ‘달리다’는 뜻으로, 이 식재료가 내게 오기까지 분주히 뛰어다닌 모든 사람에게 감사드린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몸도 마음도 지친 퇴근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연이 버스에 탄 승객들을 위로하고 감사와 감탄, 감동의 물결을 이룹니다.
“마을 경로당 어르신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수능을 앞둔 인근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한 명도 빠짐없이 돌아가도록 손수 초코과자를 만들어 전달했습니다. 선물을 받아든 학생들이 고마워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감사에 주파수를 맞춘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 감사의 파동이 일렁입니다. 감탄-감사-감동이 삼위일체처럼 움직입니다. 아, 감탄하는 한 사람에 머물지 않고,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고,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갑니다.
---「5장. 다시 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