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안전탕의 막내딸입니다. 안전탕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 서상길에 지어진 경산의 두 번째 목욕탕으로 1962년부터 1978년까지 운영되었습니다. 근처에는 경찰서, 읍사무소, 대서소, 도서관 등의 건물이 모여 있는, 그 당시에는 경산의 가장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외양은 군더더기 없는 네모반듯한 2층짜리 시멘트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인근의 중앙이용원, 경일백화점의 외벽도 같은 재질로 지어진 것을 보면 아마도 동시대에 지어진 건물들로 짐작됩니다.
목욕탕이 처음 지어졌을 때에는 일본 목욕문화의 영향을 받아 남탕, 여탕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천장이 뚫려 있어 양쪽의 소리가 그대로 생중계되는 형태였는데 샤워기 없이 수도꼭지를 틀어 대야에 물을 받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보일러실도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끓여서 탕으로 보내는 전근대적 방식이었습니다. 임씨 성을 가진 주인이 이런 형태로 잠시 영업을 하고 있던 것을 아버지가 1962년에 인수하여 남녀 탕의 천장을 메우고 보일러실을 큰 물탱크로 개조해 영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물을 데우는 방식은 서상길 위쪽에 있던 제재소에서 톱밥과 나무를 사 와서 불을 때는 전통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더운 여름날 러닝만 입고 리어카에 나무를 싣고 오던 아버지 모습이 생각납니다.
--- p.8 「안주희, 안전탕에서 경일백화점까지」중에서
1990년대 말 영세 두부공장이 난립하자 경북도는 대구시 및 인근 두부공장들의 합병을 유도했다. 이 과정에서 서상길 ‘연두부’는 당시 경산군 안심읍 율하동에 위치한 두부공장과 합병됐다. 2006년 HACCP 인증을 받기 위해 30억 원이라는 거금의 투자가 필요해졌고, 결국 그로 인해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동네 어귀 어디에서나 고소한 냄새를 풍기던 두부는 우리 생활의 곳곳에 자리 잡았다. 저녁 반찬을 준비할 때쯤 어머니는 자주 두부 한 모를 심부름으로 시켰고, 그러면 가게에서 비지를 공짜로 주었다. 어머니는 김치와 함께 끓인 비지찌개를 두부보다 자주 상에 올렸다. 비지가 공짜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말라붙어 딱딱해진 스뎅 그릇에 담긴 비지찌개를 당시에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시절의 기억과 남루함은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사라지지 않는다.
--- p.24 「박경숙, 25번 국도의 사라진 건물들」중에서
서울에도 대구에도 종로가 있다. 읍성이 있던 지역은 어디든지 종로가 있다. 읍성 내 종각이 있던 거리가 종로니까 말이다.
경산의 종로는 읍성의 동문에서 서문에 이르는 동서로를 말한다. 새 주소로는 경안로21길이다. 현청 앞을 지나는 남북로와 지금의 회나무염소식당 앞 네거리에서 교차한다. 서문에서 출발하니까 합동양조장과 연두부(현 강변보양탕)에서 출발해 일본식 가옥, 은하미용실, 철공소방앗간, 남부자전차, 회나무, 보문사와 접해 있다. 종로에는 이들 이름난 건물 외에도 지금은 사라진 헌책방과 쌀전, 연탄 가게, 대구상회 등 일본건축에 영향을 받은 근대건물과 각종 상업 시설들이 즐비했다. 특히 현재 일본식 가옥과 딸기잼 공장 사이에는 경산읍성에서 가장 뚜렷하게 그 존재가 전해지는 진옥루가 있었다. 딸기 공장 벽에서 서상부엌, 종가집 주방까지 아직도 지적도상에 국유지, 즉 삼남동 161번지 사적지로 기재돼 있다.
--- p.33 「양은영, 경산의 종로, 근대건축물들」중에서
회나무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의 병을 치유하는 신이한 힘이 있다고 전해져 온다. 마을의 번영과 무사 안녕 등을 빌었던 회나무를 마을 사람들은 사랑하고 아꼈다.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은 회나무를 지키지 못했다.
흙을 밟으며 걷던 길은 딱딱한 도로로 변하고, 나무와 숲이 있던 곳은 많은 차와 건물이 생기면서 회나무는 도로 한복판에 홀로 서게 되었다. 매일 뿜어져 나오는 차량 매연으로 회나무는 숨을 쉬지 못하고 서서히 말라 죽었다. 죽은 뒤에도 나무를 베려는 사람이 나서지 않아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 사라졌다. 회나무가 있던 자리는 일직선 도로가 되었고 회나무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경안로 도로변 소공원에 수령 30년 회나무를 심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었다. 회나무는 사라졌지만 500여 년간 마을을 지켜온 당산목은 마을 사람들 가슴속에 아직까지 살아 있다.
--- p.104 「조정은, 서상길 나무」중에서
이 동네는 천천히 변해. 심지어 70년째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조용히 낡아가는 철공소 겸 방앗간도 있어. 세상은 빠르게 빠르게 변하고 낡은 건물들은 후딱후딱 헐어서 새 건물 올려 부동산 시세를 올리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 동네는 웬일인지 옛 모습 그대로의 건물들이 조용히 앉아서 세월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가만히 낡아가고 있어. 그런 집들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을 조용히 걸어다니다 보면 할머니의 할머니 냥이 때부터 ‘냥이답게’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목소리가 저 골목 끝 흙담장 아래에서부터 바람 소리와 함께 묻어와 가슴을 울린단다.
--- p.104 「김경희, 밤의 주인, 길냥이 보리의 하루」중에서
여느 옛 건물이나 상점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사라지듯이, 경일백화점도 마찬가지였다.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던 경일백화점은 경산공설시장으로 본점이 옮겨가고 세월이 지나면서 서상길과 함께 쇠퇴해 2010년에는 건물마저 스러졌다. 경일백화점이 있던 자리는 지역신문인 경산신문사가 운영하는 북카페‘시가 있는 집(詩집)’으로 바뀌었고,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 시절의 모습은 이제 외벽에 그려져 있는 자그마한 그림과 입구에 있는 안내문, 사라지기 직전의 건물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으로만 남아있다.
--- p.142 「원동건, 경일백화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