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무리되지 않은 시가 쌓여가던 무렵 병마와 싸우던 오빠가 급작스럽게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까지 돌아가시면서 시는 무엇일까 라는 물음에 직면했다. 두 개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시 쓰기에 몰두했으나 날은 풀리지 않았고, 그때 처음 시의 체질을 경험했다. 손가락이 곱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지경으로 추웠다. 손이라도 녹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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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가난한 형편을 나아지게 만들지 않는다. 죽은 피붙이를 되살리지 못하며, 미래를 꿰뚫는 예지력은 더욱 없다. 다만 곁에 있을 뿐이다. 시는 대상을 빌어 사람을 쓰는 일이며, 그것도 사람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상처를 건드리는 작업이므로 시의 감정은 읽는 쪽으로 옮겨진다. 그들의 사랑이 너의 절망이 그녀의 미련이 그의 좌절이 속절없이 내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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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哀悼)는 ‘슬플 애’와 ‘슬퍼할 도’를 써서 슬퍼하고 또 슬퍼하는 일이다.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였을 때 깊이 슬퍼하는 것으로 상실의 고통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슬퍼하고 또 슬퍼하는’, ‘깊이 슬퍼하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이기록 시인은 ‘네 이름을 허용하는 것’이 애도라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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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 시인은 왜 무겁고 어둡고 암울한 시적 자아를 상정한 것일까? 이성복 시인의 말을 빌리면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다 계속해서 실패하는 형식’이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시는 하고 싶은 말의 ‘빌미’이자 ‘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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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아정 시인은 몸 전부를 눈으로 사용하려는 것 같다. 시인의 눈은 터널의 어둠이나 거울에 뒷모습만 비추고 있는 ‘그’의 불안과 벚꽃의 일용할 빛의 쓰임에 집중한다. ‘불황’은 사물조차 ‘공황장애’를 앓게 만들기에 ‘불황’ 속에 놓여있는 ‘그’의 일상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조명 꺼진 터널’이다. 방문객 하나 없이 오롯이 혼자 견디는 겨울이다.
--- p.38
박서영 시인은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손을 뻗어 붙잡고 싶은’(「세월 너머 멀리멀리」) 것 또한 ‘빗줄기’였다. 그는 대놓고 ‘내가 비를 좋아한다는 걸 당신이 잊지 않기를’(「능소화」) 당부한다. 앞으로 비가 오는 날이면, ‘떠나는 사람의 긴 발처럼 밤비 내리’는 밤이면 누군가 ‘성큼성큼 떠나버렸는데도 여전히 떠나는 소리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겠다. 시인은 떠나기 전 자신이 머물 곳을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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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의 시 쓰기는 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도 역사의 무게를 감내하겠다는 다짐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쏟아낸다.
--- p.61
색깔은 힘이 세다. 안차애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초록을 엄마라고 부를 때』에는 표제시를 비롯한 여러 시에서 색깔의 힘을 만끽할 수 있다.
--- p.71
김사리 시인은 상상과 함께 환상도 자주 사용하는데, 앞서 「비상구」에서 살폈던 상상의 방식이 사회문제의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면 환상은 객관적 거리를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가족사를 다룬 시에서 그 역할이 두드러진다.
--- p.87
영아 유기, 전쟁, 인권 유린 같은 주제는 무겁고 시로 표현해내기에 부담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박길숙 시인은 이 같은 부담감을 덜기 위해 소녀 화자의 어법을 차용한 것이리라. 이로써 시는 마치 아이가 몰입하고 있는 하나의 놀이처럼 여겨진다.
--- p.101
한편으로는, 강미영 시인이 호명하고 있는 ‘당신’을 미완의 문장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앞서 살핀 여러 시의 시작법이 ‘환상’을 전면에 배치하고 ‘문장’을 스케치하는 방식을 차용하고 있다고 했는데, ‘당신’은, 환상 속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만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는 갈망하는 문장이다.
--- p.113
필자가 권정일 시인을 알게 된 것은 오래된 신문 기사를 통해서였다. 부산 문학사를 통사로 살필 기회가 있어 부산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뒤지던 중 권정일 시인이 네 번째 시집인 『어디에 화요일을 끼워 넣지』로 제39회 이주홍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는데 시집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화요일이라는 시간적 규칙성을 무너뜨리는 발칙한 발상이 신선했다.
--- p.123
석민재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는 미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곧바로 ‘내가 되지 않게 내가 되고 있’겠다고 한다. 내가 되지 않도록 내가 되고 있겠다는 게 무슨 말일까. 이런 모순적인 문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p.139
부산 출신 모더니즘 시인 7인이 만들어가는 동인지 세드나(Sedna)의 멤버이기도 한 유지소 시인은 유쾌한 비틀기의 면모를 즐겨 보여주는 시인이기도 한데, 두 번째 시집 역시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 p.149
결국, 우리 눈 앞에 펼쳐진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나’이거나 ‘너’이거나 ‘우리들’이며, 그 모든 연결점을 거미줄처럼 펼치는 이가 바로 시인이다. 박춘석 시인이 쳐놓은 거미줄에 오래 잡혀 있었다. 잡힌 줄도 모른 채 깊어졌으니 더 깊어질 일만 남았다.
--- p.163
신정민 시인은 ‘인간’에 대한 관념을 두 번에 걸쳐 파기시킨다. 먼저 사람을 사물화시켜 기존 시에서 많이 구사하는 사물의 인간화(의인화), 즉 인간 중심적 사고를 허문다.
--- p.165
정안나 시인이 구현하는 시세계는 간극이 크든 그렇지 않든 양편으로 나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이분법적인 분절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앞서 살폈듯이 양쪽을 두루 살피는 중간자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사이를 택한 것일까?
--- p.182
채수옥 시가 보여주는 이질적인 것들의 규합이나 에두름의 방식은 거리 확보에 있어 매우 주효한 전략이다. 그 결과로 개인사는 한 개인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복희’로 거듭날 수 있다. ‘뜻밖의’ 복희 출현으로 인해 치매 환자를 무겁게만 여기지 않는 새로운 시선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 p.201
김예강 시인의 고정관념을 깨는 작업은 『가설정원』에 실린 여러 시에서도 발견된다. ‘이미 이곳은 없어진 곳에서/깨어나기 시작한다 어깨 한쪽이 기울어지고 있었다’(「선잠」)처럼 공간 구분의 무의미를 설파하거나 ‘흔들리는 집을 흔들리지 않을 집을 지을 것이다’(「언니」)처럼 상반된 개념을 한 데 뒤섞어버린다.
--- p.211
그렇다면 시인은 왜 그들을 주목한 것일까. 이는 전다형 시인이 시와 교접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큰 숨을 토하며 ‘천 개의 장’을 넘는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알기까지’(「슬픈 열대」), 끝끝내 ‘천 개의 장’을 만날 때까지. 그 과정은 시인의 표현대로 ‘4,767년’의 시간이자 ‘수천수만’의 반복이다.
--- p.220
『식물원』에 이어 세 번째 시집 『작가의 탄생』(민음사, 2020)을 출간한 유진목 시인은 현재 부산 영도 흰여울 문화마을에서 [손목서가]라는 북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영도다리를 건너가면 입구와 출구가 다른 푸른 봄을 만날 수 있으리라.
--- p.230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써야 한다고 말한다. 쓰지 않으면 ‘시간이 멈’추고, ‘계절이 사라’지므로. ‘흰 것’으로 지칭되는 위태롭고 불안하며 곧 녹아 없어질 것을 쓰는 행위는 결국 세계가 움직이는 이치와 같다. 그러므로 박영기 시인이 ‘시시’한 ‘시 같은’ 것을 ‘쓰지 않는다’ 말하는 시를 쓴 이유일 것이다.
--- p.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