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승 중심으로 조계종단이 출범하자 산중 사찰에도 정화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청암사를 장악하고 있던 대처 측과 개울 건너 극락전 강원의 비구 측이 정화로 시비하던 중 멱살잡이와 주먹다짐이 일어나 양쪽이 다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인원은 7~8명으로 양쪽이 비슷하였으나 비구 측은 20대 학인이었고, 대처 측은 결혼한 승려들이었다. 대처 측이 고소하자 비구 측도 맞고소하여 다음 날 양쪽이 다 지서에 불려가게 되었다. 그때 고우 스님은 발목이 접질려 걸을 수가 없어 가지 못했다. 비구승들이 지서에 가보니 대처 측은 이빨이 부러지는 등 많이 다쳤다고 하였고, 이쪽에서는 고우 스님이 아주 심하게 다쳐 걸을 수도 없어 못 왔다고 하였다. 지서를 다녀온 비구승들은 사태가 좀 심각하다는 것을 느끼고 고산 스님이 주재하는 대책회의를 열어 고우 스님을 비롯해 세 사람을 주모자로 해서 책임을 지기로 했다.
--- 「청암사 정화로 인한 도피행」 중에서
정화는 대처승을 절 밖으로 내쫓는 것이니 분위기는 싸움터 같았지만, 탄허 스님은 대강백답게 그런 정화의 와중에 10일 동안 『장자』 「재물론」 특강을 하셨다. 정화를 도우려 전국에서 온 강원 학인들은 탄허 스님 강의에 관심이 높았고 좋아했다. 불과 열흘밖에 안 되는 강의였지만, 책을 구하기 어려웠던 그 시절, 탄허 스님은 칠판에 『장자』 「재물론」을 한 구절 쓰시고 강의하고 지우고 다시 쓰고 하며, 그것을 다 외워 강의를 하셨다. 글씨도 명필에 워낙 박학다식하고 설법도 유창하여 공부 열기가 대단했다. 어떤 스님이 “어쩌면 그렇게 머리가 좋으시냐?”고 탄허 스님에게 물으니 스님 말씀이 “어떤 글을 보더라도 300번은 봐야 한다.”고 하셨다. 탄허 스님 공부하는 방식이 그러셨다.
--- 「불교와 선을 알게 되다 중에서」 중에서
고우 스님은 1965년에 묘관음사 길상선원으로 가서 조실 향곡 스님께 인사를 드렸다. 향곡 스님이 물었다. “강원 공부는 했느냐?” “고봉?관응?혼해 스님께 사교 『금강경』까지 보고 대교과 『화엄경』 공부를 못 하고 참선하고 싶어 선방에 왔습니다.” “그래. 그러면 화두는 ‘마음도 아니고, 한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가?’ ‘이 뭣고?’ 화두를 들거라. 그동안 강원에서 ‘일체유심조’라 하여 마음도 배웠고, 마음이 부처라 하여 부처도 배웠을 거고, 한 물건이라는 것도 배웠겠지만, 그거 다 아니다. 이걸 화두로 의심해서 참선 열심히 하거라.”
이렇게 하여 고우 스님은 “마음도 아니고, 한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참구하기 시작한다. 성철 스님도 1967년 해인총림 동안거에서 ‘백일법문’을 하실 때 대중들에게 이 화두를 준 것을 뒤에 알게 되었다. 향곡, 성철 두 선지식은 당시에 참선 수행자들에게 같은 화두를 준 모양이다.
--- 「묘관음사 선원에서 참선을 시작하다」 중에서
2012년에 불교인재원이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백일법문』 대강좌’를 열었을 때 고우 스님은 화두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불교에 대한 정견正見을 세우고 한다면 어떤 수행법이라도 다 좋습니다. 꼭 화두 참선이 아니라도 염불, 간경, 위빠사나, 봉사, 보시, 지계 등 불교 수행이면 다 좋습니다. 그러나 화두 공부가 가장 빠르다는 특색이 있어요. 이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이니 중생이라는 착각만 깨면 바로 부처로 돌아가는 공부입니다.
화두에 믿음이 가면 화두 참선이 가장 쉽고 빠르고 편리한 공부입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나 공부할 수 있으니 아주 좋습니다. 가령 경전 공부는 경전이 있어야 하는데 화두는 아무것이 없어도 집이나 직장이나 길에서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요. 다만 한 가지 문제가 화두에 대한 믿음이 나야 화두 공부가 된다는 겁니다. 화두가 무엇이고, 화두를 통해서 분별망상을 타파하여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이 서야 공부가 쉽고 빠릅니다.
또 화두에 대하여 의심이 나야 합니다. 화두 의심이 간절할수록 공부가 잘되고 빠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아요. 그래서 불교를 바르게 공부하여 정견을 세우고 수행을 해야 합니다. 불교가 무엇이고, 화두가 무엇인지 바른 안목을 갖추고 참선을 해야 해요. 그러면 화두 참선만큼 공부가 쉽고 빠르고 효과적인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 세계적으로 이 화두선이 주목받을 것입니다.” 고우 스님께서 평생 화두 참선을 한 끝에 도달한 간명한 결론이었다.
--- 「향곡 스님의 선 법문과 고우 스님의 화두」 중에서
김룡사에 모여 봉암사 정화결사의 원력을 세웠던 10여 수좌들은 드디어 1969년 가을 추석을 지나 봉암사에 들어갔다. 당시 봉암사에는 한곳에 모여 좌선할 선방도 없었다. 전쟁 직후인 1956년에 봉암사 결사 참여자 중 막내 격인 도우 스님(도선사 청담 스님 상좌)이 주지를 맡아 산판山坂을 해서 60평짜리 큰방을 크게 지었는데, 다 지어갈 무렵 목수의 실수로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 그 뒤 만성 스님이 주지를 맡으면서 큰 법당을 짓다가 중단되어 봉암사는 대중이 한곳에 모여 정진할 만한 공간도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10여 수좌들은 여러 전각에 흩어져 각자 정진할 수밖에 없었다.
--- 「봉암사 제2결사 이야기」 중에서
그러던 어느 날 고우 스님은 참선 중 처음으로 큰 체험을 한다. 당신은 뒷날 이 심원사 깨달음을 ‘공 체험’이라 하였는데, 고우 스님께서 직접 남기신 말씀을 들어보자. “하루는 아침에 좌선을 하고 있는데 불현듯 ‘무시이래無始以來’라는 구절이 떠오르더니 ‘그 무시이래가 비롯함이 없는 아득한 옛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이구나!’ 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강한 느낌이 왔어요. 엄청나게 환한 느낌이 와서 기분이 너무 좋았지요. 그래서 『서장』을 찾아 살펴보니 그전에는 이해 안 되던 대목이 화두 빼고는 다 이해가 돼요. 화두도 이젠 시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는 아주 좋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공에서 공을 여의었어야 했는데.” 35세에 고우 스님은 심원사에서 공空에 대한 체험을 한 것이다. 그동안 강원에서 불교를 공부하면서 공에 대하여 이론적으로만 알았는데, 이제는 마음으로 체험하게 되어 확신이 들었다. 마치 다 깨달은 것 같았다.
--- 「감옥살이와 심원사의 공空 체험」 중에서
고우 스님은 성철 방장스님이 오시자 당신이 쓰던 방으로 모셔서 쉬게 해드렸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마침 잘됐다! 우리 선방에서는 보조 스님 이래로 돈오해서 점차 미세 망상을 없애가는 돈오점수를 깨달음으로 알고 있는데, 성철 스님이 ‘돈오점수는 교학에서 하는 말이고, 선은 돈오돈수다. 화두 참선해서 확철히 깨치면 돈오고 돈수다’라고 하시니 통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오늘 이렇게 뜻밖에 만났으니 하늘이 준 인연이다. 왜 그렇게 말하는지 따지고 물어보자.”
이렇게 굳은 결심을 한 고우 스님은 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성철 스님이 계시는 방으로 들어가서 정중히 삼배를 드리고 나서 앉아 다짜고짜 말을 던졌다. “스님, 돈오점수가 맞지 않습니까?”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철 스님은 획 돌아누워버리셨다. 그렇게 누워서는 한 마디도 대꾸가 없었다. 너무나 뜻밖의 성철 스님 행동에 고우 스님은 당황하여 더 말을 붙일 수 없어 우물쭈물하다가 할 수 없이 그냥 물러 나오고 말았다.
--- 「“돈오점수가 맞지 않습니까?” 하고 성철 스님께 대들다」 중에서
머리맡에 책이 한 권 있어 무심코 집어 보니 『육조단경』이었다. 『단경』을 펼쳐 보던 중 우연히 --- 「정혜불이품」중에 “정定과 혜慧가 둘이 아니다. 정과 혜가 하나가 되어도 비도非道다.” 하는 구절을 보고는 벼락이 치는 듯한 충격을 받고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그동안 스님은 ‘정과 혜가 하나가 되면 도’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고는 일어나 그 뒤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과 혜가 하나가 되어 통류通流해야 도道다.”라는 구절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동안 알고 있던 깨달음에 대한 생각과 너무나 달라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으니 드디어 확연해졌다.
그런데 ‘정혜가 둘이 아니고 통류해야 한다’는 『단경』의 구절을 알게 되니 또 다른 것을 깨치게 되었다. 참으로 묘했다. 예전에 누가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의 뜻을 물었는데 제대로 답을 못 해주고 거기에 막혀서 상당히 고심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이날 불현듯 ‘통류通流’를 알게 되니 그 막혀 있던 ‘백척간두 진일보’의 뜻을 깨치게 된 것이다.
--- 「각화사 동암에서 깨닫고 돈오점수의 한계를 알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