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논저가 나와 있다. 그 때문에 더는 다룰 만한 의미나 신선한 주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난징의 도시 역사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이미 나온 논저들은 그 의미와 치밀한 고증에 보편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많아서, 같은 책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부분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또 아주 중요한 주제인데도 아직 연구자의 주의를 끌지 못한 분야도 꽤 있다. 그 때문에 연구 초기에 마주한 자료들은 모호하고 분분한 의견과 난삽하고 조리 없는 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그 속에서도 연구할 만한 여지가 꽤 있었다.
연구가 깊어질수록 나는 이 연구의 범위가 매우 광범위함을 발견했다. 다양한 관계들을 정리하고 나니 마치 구름 속에 가려진 해를 보는 듯한 날들이 이어졌고 그 재미와 기쁨은 점점 더 깊어졌다.
---「서문」중에서
그날, 김구는 후항선의 마지막 완행열차를 탔다. 김구는 처음에는 제랄딘 피치 여사와 부부 행세를 하기 위해 서양 남자 모습으로 변장했다. 그리고 역으로 가는 도중 차 안에서 다시 옷을 바꿔 입어, 내릴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검은색 모자와 검은색 긴 셔츠, 어느 정도 신어 길이 든 검은 가죽 구두를 신어 마치 사업을 하는 사람처럼 변장했다.
김구 등은 차에서 내린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나무 다리를 건너 기차역을 향해 걸었다. 피치 부부는 차 안에서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피치 부부와 김구가 이렇게 헤어진 다음, 언제 다시 만났는지는 관련 서적을 찾아봐도 없다. 다만 김구가 《백범일지》에, ‘나중에 피치 부인이 집 전화를 마구 사용하는 바람에 의심을 사서 위치가 드러났다 했다’고 썼는데, 이 ‘나중에’를 세 개의 시간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2장」중에서
김구는 많이 배운 지식인 여성과 함께 생활하게 되면 쉽게 신분이 드러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글도 모르는 뱃사공 주아이바오의 도움을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1932년 자싱에 온 뒤, 김구는 주아이바오와 함께 생활했다. 후에 난징으로 갈 때도 주아이바오와 함께 갔고, 1937년 김구가 급작스레 난징을 떠나게 되었을 때야 두 사람은 헤어졌다.
1990년대부터 중국에서는 김구와 주아이바오의 이야기를 엮은 소설과 연극이 나왔다. 1999년 인민문학(人民文?)출판사에서 소설 《선월(船月)》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한국어판도 출간되었다.
---「3장」중에서
장제스는 김구를 만난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학생들을 무관으로 훈련시키려는 계획에 동의했다. 1933년 2월 22일, 천궈푸는 샤오정에게 전보를 보낸다. 뤄양군관학교에 한국인 동지들을 훈련시키는 반을 개설하기로 했고, 이 일은 이미 장제스에게 허락한다는 답을 받은 일이니 즉시 한국 측에 알리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김구는 바로 학생들을 모집하고 교관을 청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처럼 장제스와 김구의 만남은 국민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협력해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중요한 상징이다. 그날 이후 김구는 국민정부의 재정적 지원 아래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해, 거의 와해 상태로 가던 임시정부를 지탱해나갔다. 1935년 11월 3일, 임시정부는 조직을 개편했는데 국무위원 7명이 한국국민당 간부였다. 김구는 외무장을 맡아 임시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 후 국민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협력관계는 밀접해지기 시작했고, 점점 심화되었다.
---「4장」중에서
1973년 2월 22일, 샤오정이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23일 건국대학교에서 명예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바로 김구의 묘소로 가서 참배를 했다. 후에 샤오정은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내가 굳이 한국에 가서 학위를 받은 것은 사실은 고인을 참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김구 선생이 한국으로 귀국하고 나서 얼마 안 가 암살당한 뒤 안공근, 박찬익, 이청천, 조소앙과 민필호 같은 임시정부의 중요한 요인들도 모두 다 세상을 떠났다. 지난 20여 년 동안 김신 장군과 자주 서신으로 연락을 한 것 외에 한국에는 이미 찾을 수 있는 옛 친구가 없어, 한국에 오지 못했다. 이번 한국행은 김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선생이 살던 곳을 보기 위해서이다. 이제 교통부 장관이 된 김신 장군은 내가 오자 뜨겁게 환영해주었고, 도착한 다음날 김구 선생의 묘에 동행해주었다. 묘 앞에서 오랜 친구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