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이나 우울과 달리 지루함은 세상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망이며 그 대상을 명확하게 찾지 못함에 대한 불만이다.
--- p.47
상식적으로 소음이 큰 환경일수록 과제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똑같은 과제를 하더라도 체감하는 난이도는 그룹 3, 2, 1 순서로 높아진다. 이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로 인한 불쾌감, 지루함에 대한 인식은 차이가 있었다. 과제에 집중하기 어려운 이유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소음 수준이 매우 낮았던 2그룹의 사람들이 1그룹보다 지루함을 더 많이 호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시끄러운 소음이 있는 환경에서는 과제에 집중하기 어려운 원인을 소음 탓으로 돌리게 되지만, 소음이 있으나 그 정도가 매우 낮은 환경에서는 주의를 더 기울여야 하는, 감정적으로 불쾌한 상황을 과제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과제를 더 지루하게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지적 노력의 원인을 어디에 두는가, 이른바 귀인의 문제가 지루함 경험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 p.51~52
엠마가 자신의 일상을 숨 막히는 감옥처럼 여기는 것은 단조로움 그 자체때문이 아니다. 더 나은 ‘바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p.68~69
진통제 과다 복용으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문제가 지루함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항상 뭔가에 주의가 쏠려 있어서 오히려 더 지루해지기 쉬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p.75
르윈스키의 분석에 따르면, 지루함을 자주 느끼는 사람들일수록 모든 것을 멈추고 가만히 응시하는 것을 어떻게든 피하려 한다. ‘심심하다’, ‘지루하다’며 재미있는 것을 찾고있지만 사실은 뭐라도 찾아내어 자신의 주의를 그쪽으로 돌리려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단둘이 있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 p.95
자극이나 활동, 대상으로 해결될 수 없다면 지루함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르윈스키의 말대로 “서서 응시하는 능력”의 회복이다. 활동이나 자극으로 계속 도망다니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서 바라보는 능력,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경험하고 탐구하는 능력, 가짜 대상이나 가짜 목표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만나는 능력.
--- p.97
잠재적 지루함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이 대목에서 ?지루함과 레디메이드 인생?에 담긴 번스타인의 통찰은 정점을 찍는다. 그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부모가, 사회가 아이들을 과도하게 억압하면서 소외가 시작되고 만성 지루함이 생겨난다고 진단한다. 예를 들어 친구를 사귀기 어렵거나 잘하고 싶은 것이 잘 안 되어 어려움과 좌절을 겪을 때, 어른보다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더 많이 경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경험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사회적 성공”을 위한 조건들은 이미 다 정해져 있고, 아이들은 시간을 최대한 아껴서 단계별로 이 조건들을 따라잡아야 한다.
--- p.104~105
모든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야 하고, 쓸모없는 것은 없어야 한다. 모두가 서둘러 이미지를 입는다. 내게 맞는 것인지, 내게 필요한 것인지 파악할 시간조차 없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따라잡느라고 바쁘다.
--- p.106
언제라도 스마트폰을 꺼내어 새로운 자극으로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오늘날, 여기저기 구경하고 돌아다니지만 어디에도 연결되기 힘든 사람들은 지루함을 덮기 위해 또 다른 지루함을 불러들인다.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디지털 지루함은, 존재의 근본 조건인 심층적 지루함을 은폐하여 알아차리기 어렵게 한다. 해야 할 것이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할 일이 없는 상황을 제일 두려워한다.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세우고 인정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에 계속 타인의 기대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 p.121
감정을 경험하려면 때로는 질서의 무너짐을 겪어야만 하는데 그러려면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 일시적으로 시스템이 마비되는 것을 허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생산성 저하다. 감정을 써야 하는 관계는 웬만하면 피한다. 불확실성이 높고 종종 불편하며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그다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관계는 맺지 않으면서 소외되고 배제되기 싫어서 실제 집단의 대체물인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를 드나든다.
--- p.186~187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일들이 벌어지는 오늘날의 지루함은 단조로움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감각적 자극들, 늘 업데이트되는 이야기와 뉴스들, 재미있는 것들이 넘쳐나며, 디지털 기술의 발달 덕분에 사람들은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린다. 그런데도 지루함을 느낀다. 자극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미가 없어서다. 신호들만 넘쳐나고 진정한 정보는 희귀하다. 관계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복잡함 속에서도 무의미와 지루함을 느낀다.
--- p.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