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있는 환자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었다. 그 사연이라는 것을 듣고 보면 어디에선가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들이었고, 누구에 게라도 있을 수 있는 일들이었다. 말하자면 방심을 했거나 운이 나빠서 이곳으로 유배된 거나 다름없었다. --- p.48
은설은 알고 있었다. 잊고 싶었던 것들, 잊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머릿속 서랍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서랍을 열어보지 않았을 뿐 모든 기억은 순서대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자기 것이지만 자기 마음대로 내다 버릴 수 없고, 버리고 싶어 할수록 더 진해지는 것이 기억이었다. --- p.119
종이비행기는 더없이 가벼웠으나 거기에 적어 넣은 사연은 한없이 무거웠다. 종이비행기가 이륙했어도 이내 추락하고 만 까닭은 사연의 무게 때문이 아닐까. --- p.188
꼬인 매듭을 풀려고 했다가 더 엉켜버릴 때가 있는가 하면, 매듭 하나만 제대로 풀면 그 뒤는 술술 풀어지는 때가 있다. 마치 우연처럼 보이지만, 우연들이 겹치거나 합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장난질을 즐기는 운명이다. --- p.226
사람의 삶에서 우연을 빼면 뭐가 남을까. 삶이 지속되기나 할까. 운명은 우연의 모습으로 온다. 그렇다고 우연이 다 운명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우연과 운명 사이에 놓인 것이 있다. 바로 인연이다. 정작 인간의 삶을 지속시키는 것은 바로 이 인연이다. --- p.260
“난 막차가 끝이 아니라고 생각해. 막차가 있어야 첫차도 있는 거잖아. 첫차가 희망이면 막차도 희망인 거야. 왜냐하면 막차는 첫차에게 새로운 출발을 약속해 주니까. 말하자면, 마침표를 찍는 게 아니라 첫차를 위해 쉼표를 찍는 것일 뿐이야.” --- p.324
누군가는 종이비행기를 멜로영화라 생각하겠지. 그러나 은설에겐 몸서리쳐지는 공포영화였다. --- p.344
설하(N) 이 얼굴이 진짜 내 얼굴일까? 지금까지 나는 내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다. 남들은 내 얼굴을 본다. 나는 거울 같은 반사체를 통해서만 나를, 나라고 믿는 얼굴을 볼 뿐이다. 여기 이 창에 비친 얼굴이 진짜 내 얼굴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