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르간 계단석에 홀로 있고 싶어. 홀로 모든 걸 굽어보면서 말이네. 슈투트가르트 대성당의 중앙홀 위쪽에 홀로. 오직 하늘의 주님과 단둘이. 무엇보다 군중의 눈에 띄지 않고 홀로. 오직 오르간 연주자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연주자니까. 그렇네, 내가 부자라면 아마 클라브생을 그만둘 거야. 그리고 처음 시작한 오르간으로 돌아갈 거네. 그리고 이 도시 저 도시로 떠돌겠지. 이 세상의 도시들을 떠돌길 좋아하는 걸 그만두진 않을 테니까. 그러나 이 살롱 저 살롱을 떠돌진 않을 거네. 이 오르간 저 오르간을 전전할 거야. 돌벽 위, 중앙홀 위쪽, 기념비 같은 거대한 문에 용접된 곳에서, 나무와 쇠, 파이프와 강철로 된 나의 둥지 속에서 홀로, 세상에 홀로, 세상을 홀로 마주할 거네. 지붕 위 굴뚝에 기대거나 빗물받이 함석 홈통 속 요람에 웅크린 고양이들처럼.
--- p.28
나는 버림받았다. 나는 버리기를 좋아했다. 나는 아무 의심 없이 달아나길 좋아했다. 그것은 언제나 나보다 빨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를 추월했다. 나를 뛰어넘었다. 그것은, 아마도 내 꿈들의 밑바닥에서 내 안의 기다림이 기다려 온 것이었을 터였다. 어느 날, 여전히 동기를 알지 못하는 그런 갑작스러운 떠남을 경계해 오던 나는 이렇게 다짐했다. 어떤 꿈이건 내 꿈들을 좇고, 더는 나 자신에게 내 모험을 이해시키려거나 그 이유를 찾아 주느라 지체하지 않겠다고. 우선 나는 밤에 그 꿈들을 어느 책의 간지에, 악보 귀퉁이에 적었다. 그 꿈들이 나의 갈망들, 바람들, 희망들, 혐오들을 풀어내서 등급을 매기도록 말이다. 나는 잠에서 깨면서 전조들을 상상했다. 온종일 그 생각에 빠지곤 했다. 그러고 하루가 끝날 무렵, 햇빛이 충분치 않아서 악보 필경을 그만두는 시간이 되면 나는 그 자리에서 온갖 별자리 점과 연이은 긴급한 결정들을 끌어냈다. 양초 심지에 불을 붙이고, 와인을 한 잔 따르고, 타로 카드에서 도주하는 점괘를 뽑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삶이 되었다. 내 삶은 꿈이 결정한 꿈이 되었다.
--- pp.64~65
화가 몸므는 말하곤 했다. 몸이 영혼을 요구한다고. 그러나 몸은 영혼을 얻기 전에 하나의 이미지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익숙하면서도 마법 같은 주거로 삼는다. 그러곤 그 주거를 영혼이라 부른다.
--- p.105
우리 모두는 한낮에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불씨에 데었는데, 그것이 우리의 심장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불꽃을 다시금 날리는, 아주 작은 불씨죠. 그 불씨가 사람과 장면들을 엮지요. 아주 간략한 장면들이지만, 그 장면들은 잠자는 동안 꾸는 꿈속에서조차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집요하게 나타나지요. 설명할 길 없는 자기 상처를 떠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어요.
--- p.106
우리는 명인의 몸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자기 자신과의 모든 격차를 잊은 몸. 이 몸은 스스로 느끼는 걸 표현한다. 자신으로부터 탈주해서 경이로운 분신을 스스로 지어내는 몸이다. 모든 근육 하나하나가 받아들인 엄청난 긴장을 잊은 몸이다. 이 몸은 그 긴장에 관한 기억을 더는 갖고 있지 않다. 긴장을 구성하는 다양한 톱니바퀴를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관계와 계승에 관한 체계 전체가 의도를 잊었다. 그 몸은 더 이상 하나의 덩어리도, 하나의 무게도, 하나의 움직임도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도취다. 흰 식탁보 앞에 앉은 몸이 더는 자신이 집어삼키는 육신들의 뼈를, 형태를, 비늘을, 볏을, 뿔을, 실루엣을 지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 p.121
프로베르거는 살생한 적이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두 번,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하튼은 한 번도 살생하지 않았다. 교차로에, 요금소에 사람들이 모여들면 그는 악의 얼굴이 나타나는 걸 보았다. 그러면 그는 뒷걸음질 쳤고, 모여 있는 군중으로부터 멀어졌다. 멀리 돌아서 지날 방법을 찾아냈다. 그는 모임 한가운데에서도 언제나 사람의 얼굴을 피할 수 있도록 걸어서 건널 길이, 샛길이, 틈새가 있다고 말했다.
--- pp.155~156
오래전부터 프로베르거 선생과 함께 전쟁 중인 유럽 땅을 떠돈 노새의 이름은 프렐로르 Frelaure였다. 노새는 그의 짐을 지고 다녔다. 노새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차분했고, 살짝 길 잃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프렐로르는 오래된 동부 사투리로 “길 잃은”을 뜻했다. (…) 사람들은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프렐로르라고 불렀다. 세상 어떤 도시에서도 일자리를 찾을 가망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
탈주한 짐승은 다시 맹수로 돌아간 동물이다.
길 잃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은 사람이다. 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더는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떠돌이는 떠돌아다니는 걸 직업으로 삼은 자다.
--- p.166
―기억력이 기억을 유지할 것을 제안하듯이, 음악은 고통을 울려 퍼지게 하죠. 그렇게 예술은 간극을 벌려 고통을 그것의 원인과 떼어 놓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위로하지요. 심지어 저는 예술이 이전까지는 비탄과 공포였던 것에 마법을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예술은 충격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그 충격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틀어서 견디기 덜 힘든 풍경 속으로 조금씩 밀어 넣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술은 내가 느끼는 이 애도를 결코 누그러뜨리지 못할 거예요. 예술은 우리 세계 속에서 아무것도 진정시키지 못해요. 창작은 어떤 살아 있는 피조물에게도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고요.
―그 말이 사실일지라도, 부인, 제겐 상관없어요. 그래도 저는 창작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 p.227
덫에는 일곱 개의 음표면 충분하다.
--- p.358
우리가 불 밝힌 양초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아직 관 머리맡에 자리하고 있는 동안 우리가 애도하는 사람들은 이승과 지옥을 경계 짓는 물결에 이른다. 이때 음악이 표현하는 슬픔의 잔향은, 마지막 노래의 숨결은, 가련하게 흐느끼는 헐떡임은, 그 파도의 물결은 심연의 육중한 어둠 속으로 소멸한다. 그러는 동안 인간의 그림자들은 영혼이 되고, 영혼은 추억이 되어, 돌 위에 새겨진 글씨가 되어, 보잘것없는 연기가 되어 흩어지고, 아주 빠르게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다.
그저 몸만 삼켜지는 게 아니다. 이름도 몸의 부재 속에 금세 빠져 죽는다.
끈질기게 남아 있는 모든 윤곽은 조류가 펼쳤다가 불현듯 곱게 빗질하고 그러다 다시 흩트려 놓는 해초처럼 오래도록 저들끼리 얽힌다. 그렇게 길을 잃는다.
모래사장 위를 비추는 공기 속 햇살처럼.
우리는 이름들을 참으로 빨리 잊는다.
--- pp.360~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