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재능은 독일인들을 장악한 히틀러의 수수께끼 같은 힘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스탈린이 테러를 통해 성취한 것을 히틀러는 유혹을 통해 성취했다. 그는 상징, 신화, 의례, 스펙터클, 사적인 드라마를 매개로 한 새로운 스타일의 정치를 활용하여 대중에게 다가갔다. 당대의 어떤 다른 지도자도 하지 못한 방식이었다. 그는 독일인에게서 민주 정부를 앗아갔지만, 그가 선사한 정치 참여 감각이란 확실히 더욱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인들을 단순한 구경꾼이 아닌 국가사회주의 극장의 참여자로 변모시켰다.
--- p.17~18, 「머리말」중에서
전쟁이 끝나고 1920년대 초반이 되어서도 히틀러는 계속 예술가임을 자임했다. 퀸스틀러(예술가)에서 말러(화가), 쿤스트말러(순수 화가), 아르키텍투어말러(건축가), 때로 슈리프츠텔러(작가)라며 자신을 가리키는 명칭이 계속 바뀌었지만 말이다. 사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그는 완전히 방황하는 상태였다. 화가의 경력을 다시 시작할 만한 전망도 보이지 않았고, 다른 대안도 없었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당시 무명이었던 내게는 유의미한 활동에 필요한 아무런 기반도 없었다.”라고 인정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군에 남게 되었다가 준군사조직인 국가방위군의 ‘교육 간부’가 되었다. 장병들을 격려하고 선동하는 애국 연설을 함으로써 군의 사기를 고취하는 역할이었다. 그는 빈 시절 이후로 범독일 민족주의에 열광하는 태도를 취해 왔으나 정작 정치적 경력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청중을 이해하고 조종하는 능력만큼은 매우 뛰어나서 자신의 대중 선동 연설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진가를 발견했다. 정치가 히틀러를 찾아왔지, 히틀러가 정치를 찾아가지 않았다.
--- p.37~38, 「1장 〈보헤미안 예술 애호가〉」중에서
히틀러는 고급문화가 사실상 지배력을 행사했던 20세기 이전 시기를 부러운 시선으로 회고했다. 이 시기는 교양을 갖춘 후원자와 문화 엘리트가 취향에 관한 지침을 내릴 수 있었던 시기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그러한 시절은 이제 영영 지나간 과거가 되어버렸다.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문화 정책에는 엄청난 모순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는 예술가들에게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하도록 권고하는 한편, 대중들에게는 그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을 향유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남은 인생에서 그가 독일인들에게 강요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자신의 미적 이념과 취향─그들이 함께 공유하든 말든─이었다.
--- p.68, 「2장 〈문화 철학〉」중에서
러시아 침공 당시 독일국방군이 모스크바 바로 코앞까지 진격하고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엿보였을 때, 그는 전쟁이란 쉽게 잊히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질 때쯤에는 아무도 30년 전쟁에 관해 기억하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쟁이 끝나고 아무도 1700년경의 전투에 관해 기억하지 못했고, 스당 전투의 기억은 라이프치히 전투의 기억을 밀어냈다. 타넨베르크 전투나 우리가 치렀던 폴란드와 서부전선 전투의 기억도 이번에 치르고 있는 동부전선 전투가 끝나면 희미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동부전선 전투의 기억도 똑같이 잊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세운 건축물만큼은 굳건히 서 있을 것이다.” 그는 권력이란 ‘문화적 경이’를 만들어내는 데 써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전쟁에 든 비용보다 훨씬 많은 돈을 문화사업에 쓰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전쟁을 문화국가 건립이라는 최종 목표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 단계로 간주했다.
--- p.71, 「3장 〈거대한 역설〉」중에서
거대하고 입체적인 무대 효과가 히틀러의 특기였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청중들─독일 대중─에게 퍼레이드, 페스티벌, 헌정식, 기념식, 경례, 횃불 행렬 같은 정교한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그는 제작자, 감독, 무대 디자이너 그리고 주연 배우를 맡았다. 그만큼 오페라나 연극 공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준비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공연의 세부 사항들을 직접 챙겼다. 압도적인 시청각 효과─수천 개의 깃발과 기치, 페넌트, 장식 리본 그리고 플래카드, 이러한 것들이 보여주는 수천의 색상, 조명과 서치라이트, 횃불 행진이 자아내는 기대감, 군악대와 가수들에게서 느껴지는 전율, 팡파르, 사이렌, 축포 그리고 축하 비행이 주는 흥분─이 모든 것들로부터 연타당한 군중은 거의 넋이 나가버렸다.
--- p.112, 「4장 〈정치가인 예술가〉」중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히틀러가 예술가들을 온화한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점이다. 하인리히 호프만의 말에 따르면 히틀러는 예술가들이 ‘너무나 불안정하고, 너무나 독립적이며, 너무나 제멋대로’라고 생각했다. 슈페어는 이를 좀 더 솔직하게 표현했다. “그는 예술가들이 모두 똑같다고 생각했다. 모두 정치적 백치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온정 어리고 자비로운 통치 아래 그들은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바보들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었다. 히틀러는 사실 예술가들의 정치적 견해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어떤 예술가에게도 국가사회주의를 강요할 생각이 없다.”라고 했다. 당에 가입했거나 에밀 놀데처럼 열렬한 나치 추종자인 예술가도 있었지만, 그런이들을 대하는 히틀러의 태도는 쌀쌀맞기만 했다. 나치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예술가들도 예술적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예술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 p.152~153, 「5장 〈예술가인 정치가〉」중에서
다리우스건, 아우구스투스건, 루이 14세건, 스탈린이건, 히틀러건 모든 절대 권력자들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한다. 그들은 예술을 조작하고 거대한 건물을 지어 압도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주장과 자기 숭배를 동기로 삼는다. 그들은 자신의 낭비에 어떤 제약이 걸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히틀러는 다른 이들과 차원이 다르다.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는 데 미학을 활용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문화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지배를 규정하고 정당화한 사람도 그가 유일하다. 예술에 관한 그의 관심은 사적이고 또 진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매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 그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그는 플라톤처럼 예술을 통제하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 비극이 있다. 차라리 그가 무솔리니처럼 예술에 아무 관심도 없고 무지한 속물이었더라면, 그는 덜 파괴적이었을 것이다.
--- p.606, 「맺음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