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과학이 공히 보여 주듯 우리는 경외를 경험할수록 더 만족스럽게 인간다워진다. 인간은 경외를 원할 뿐 아니라 경외가 꼭 필요한 존재다. 경탄하도록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게 우리 인간의 본성이다. 자아 숭배라는 오늘날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이 세계적 종교가 많은 사람을 배신하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자아를 숭배하면 경외심을 잃고 공허해진다. 생각만큼 우리가 대단한 존재가 전혀 아니라서 그렇다.
--- p.33
경외심을 불어넣는 요인 가운데 특히 당신이 좋아하는 요인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관찰하면 공통점이 보일 것이다. 그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온전치 않다. 완벽하거나 영원하거나 무한한 건 단 하나도 없다. 모두 반감기[질량이나 농도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 걸리는 시간-옮긴이]를 거쳐 서서히 약해진다. 확실한 지속력이 없다. 왜 그럴까? 경외심을 불어넣는 요인은 그보다 더 존엄한 실재인 ‘신’을 가리켜 보이고자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이것들은 결론이 아닌 전제고, 바다가 아닌 강이며, 해가 아닌 햇빛, 목적지가 아닌 관문이다. 이 책은 당신 삶 속의 무수히 많은 경외의 표지판을 따라가다 그 경외의 무한한 근원인 신에게 이르자는 초대다. 진정으로 가장 자기다워지려면 막연히 경외할 게 아니라, 모든 경외의 궁극적 근원을 경외해야 한다. 그 근원은 누구일까? 바로 성경의 하나님이다. 물론 일부 독자에게는 이 말이 몹시 거슬릴 것이다. 저녁노을이나 별이 빛나는 밤이라면 탄성이 절로 나오겠지만, 많은 기독교 종파에서 주장하는 성경의 하나님이라면 거부감부터 들 것이다. 많은 이에게 기독교의 하나님은 여간해서 합당한 경외의 대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 p.34~35
뱀은 제로섬 권력에 대한 이런 엉터리 논리로 아담과 하와를 꾀었다. “하나님은 절대 권력을 유지하시려고 너희를 완전히 무력한 상태로 두신다. 하나님이 너희를 청지기로 삼으신 광활한 과수원에 아름다움과 가능성이 무르익어 있고 생명을 살리는 맛이 넘쳐 나지만, 너희가 신경 쓸 것은 그게 아니다. 너희는 오로지 금단의 열매가 달린 이 나무만 봐야 한다. 진정한 권력을 원한다면 하나님께 굽히던 것을 멈추고 신이 돼야 한다. 이 열매가 그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해 줄 보증수표다. 그러니 어서 따서 먹으라. 신의 권력을 직접 맛보라. 우주의 압제자에게서 벗어나는 달콤한 해방을 맛보라. 천국의 지배 권력에 맞서 혁명 만세를 외치라!”
모든 유혹은 이 거짓말의 변형이다. 잘 들어 보면 여전히 옛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전능한 창조주가 될 수 있는데 왜 미천한 피조물 수준에 안주하는가? 너 자신을 믿으라.” 그러나 뱀이 선전한 자유라는 열매는 결국 굴레라는 쓰디쓴 약으로 드러났다. 악의 결과물은 늘 약속과는 어긋난다. 그런 허위 광고는 도처에 넘쳐 난다. …(중략)…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도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라는 낡은 거짓말을 따르다가 몰락한다.
--- p.60~62
우리는 현시대를 살고 있을까, 아니면 오는 시대를 살고 있을까? 이에 성경은 둘 다라고 답한다. 벤다이어그램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두 시대의 원이 서로 겹쳐지는 교집합 부분에서 살고 있다. 그 둘이 동시에 우리 마음을 얻고자 치열하게 싸우며, 무한한 우주적 규모의 전쟁에서 매 순간 맞붙는다. 날마다 하루에도 수만 번씩 우리는 어느 시대에 마음을 두고 어느 나라와 어느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할지를 선택한다. 우리의 왕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딤전 6:15)이신 예수님인가, 아니면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가? …(중략)… 결국 자아를 숭배하라는 뱀의 거짓말도 당연히 패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으로 자신에게 절하는 것은 미래에 역행하는 길이다. 이미 머리를 상해서 결국 유황불에 떨어져 파멸할 운명인 뱀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스리신다는 그 실재를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분의 승전국에 들어선다. 우주의 영광스러운 결말 쪽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자아 대신 그분을 예배할 때 비로소 우리는 미래와 발맞추어 나아간다.
--- p.70~71
마음을 따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내 마음처럼 당신의 마음 역시 우둔할 뿐 아니라 너무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은 정처 없이 왔다 갔다 흔들리고 요동친다. 정체성을 떠받칠 견고한 반석이기보다 푹푹 꺼지는 모래와 같다. …(중략)…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물은 늘 흐르는지라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 마음도 이처럼 늘 출렁인다. 우기의 갠지스강처럼 휘몰아치며 흐르는 마음도 있고 추운 날의 당밀처럼 이동이 더딘 마음도 있겠지만,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만은 모든 사람이 똑같다.
--- p.84~86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에 비할 수 없이 불안정하고 못 미더울 뿐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말로 가득하다. 마음을 따르라는 교리는 순진하게도 우리 마음이 합창단 같다고 전제한다. 각기 다른 감정이 다른 모든 감정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사실 마음은 합창단보다 악기점의 시연장에 더 가깝다. 고객 50명이 각기 다른 기타와 앰프로 일제히 서로 더 크게 연주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 폐지』에서 C. S. 루이스는 “본능”이란 단어를 써서 그 사실을 담아냈다. “본능에 복종하라는 말은 여러 사람에게 복종하라는 말과 같다. 사람의 말이 서로 다르듯이 본능의 말도 제각각이다. …… 잘 들어 보면 각각의 본능마다 다른 모든 본능을 제치고 제 뜻을 이루려 아우성이다.”
--- p.88
그분은 우리를 그보다 훨씬 나은 모험으로 부르신다. 일상생활의 단조로운 현실을 늘 피하려 드는 마약중독자처럼 되게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은 몸으로 죽으시고 몸으로 부활하여 영혼과 육체까지 우리의 모든 것을 구원하신다.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게 아니라 친히 우리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오신다. 우리가 잘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지 그분은 평범한 삶에 의미를 부여하신다. 우리가 사회적 위험을 무릅쓰고 이웃에게 그분에 대해 말해 줄 때 그분이 어둠의 세력을 퇴각시키신다. 우리가 가구를 옮기고, 기저귀를 갈고, 설거지하고, 모욕을 견디고, 불편한 아웃사이더를 반기고, 때맞는 농담으로 답답한 분위기를 깨고, 음식점 종업원을 음식이라는 목적의 수단 이상으로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표현으로 “소소하고 멋없는 수많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또 희생할” 때, 우리는 영원을 건 모험에 오른다. 말로 복음을 전하고 매일의 행실로 그대로 실천할 때 우리는 프로도와 샘처럼 운명의 산에 반지를 던지고, 루크 스카이워커처럼 데스 스타의 배기구 속으로 양자 어뢰를 발사하고, 해리 포터 일행처럼 호크룩스를 파괴한다. 일상생활에 영원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 우리는 영원한 존재이기에 영원히 계속되는 진정한 모험에 합류할 수 있다.
--- p.163~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