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청 관계는 한중관계 속에서 가장 ‘전형적’이라고 평가되어 왔다. 이러한 평가 배경에는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했다는 점, 청이 요구한 예제(禮制)를 조선이 준수했다는 점, 그리고 외교문서를 왕래했다는 점이 자리 잡고 있다.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차지하고 있는 군사·경제·문화적 위상을 염두에 둘 때,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는 외교적인 측면과 함께 조선의 다양한 영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조선과 청 관계는 전쟁을 통해 국교(國交)가 성립되었으며, 그 직후 명·청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조선의 정치·사상의 향방에 핵심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조선·청 관계에 대한 해명은 양국 관계 및 조선의 정치·사상을 이해하는 주요한 기반이 된다.
병자호란(1637) 이후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양국 관계는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정치적 긴장과 별개로 양국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청의 수도가 심양(瀋陽)에 있을 때 수시로 사신이 왕래하였음은 물론, 청이 멀리 북경(北京)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조선에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청에 경조(慶弔)가 생길 때마다 보냈던 비정기 사신, 외교문서만 신속히 전달하기 위한 역관(譯官)의 행차까지 포함하면 서울과 북경 어디쯤에는 반드시 조선 사행단이 왕래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조선은 의례 측면에서 청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였다. 1960년대 중국적 세계질서(Chinese World Oder)의 구조에 관한 연구에서는 청으로부터의 위임장과 관인(官印) 수여, 작위 하사, 외국 사신 호송, 황제의 회사(回賜), 변경 및 북경에서의 무역 허가, 이와 함께 조공국의 역법(曆法) 사용, 정기적 공물(貢物) 납부, 의례에 따른 고두(叩頭) 등을 조공제도의 요건으로 정리하였다. 조선은 이러한 조건에 모두 해당하는 외국이었다. 따라서 경제·의례·군사·정치적 측면에서 조선을 ‘전형적(또는 본질적)’ 조공 국가로 정의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으로 양국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꾸준히 문제 제기가 이루어져 왔다. 먼저 ‘전형적 관계’의 공간적 범위와 시간적 지속성의 문제가 지적되었다. 역대 중국의 대외관계에서 나타나는 시간성과 공간성을 고려할 때 조공과 책봉 외에 다양한 관계(羈?, 會盟 등)가 존재했기 때문에 조공·책봉으로 중국의 대외질서를 설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에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유동적 성격을 고려하여 ‘책봉체제’보다 ‘책봉관계’라는 용어를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 흔히 ‘전형’이라고 인식되는 지표들은 각각 다른 시기에 형성되어 최종적으로는 청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표들의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마치 조선·청 관계의 핵심 요소들이 수백 년 전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이해될 우려가 있다.
다음으로 지적된 문제는 ‘전형’의 지속 기간이 지나치게 길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연구에서는 전형적 관계의 기간을 고려와 명이 정식으로 관계를 맺은 공민왕 17년(홍무1, 1368)부터 청과의 조공책봉관계가 해체되는 고종 31년(광서20, 1894)까지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한중관계 전체 기간 속에서 조선이 존속했던 500년 동안의 특성을 드러내는 데는 유효하지만, 명·청의 차이와 관계없이 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늘 동일하다고 인식하게 만든다. 최근 청을 한족(漢族) 왕조의 연장이 아닌 만주족의 특징이 지속된 국가로 해석하려고 하는 ‘신청사’(New Qing History)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에 발맞춰 조선·청 관계가 조선·명 관계와 다른 맥락에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연구들도 이루어지고 있다. 더하여 250여 년 동안 지속되었던 조선·청 관계를 단순히 갈등-안정으로 구분하는 것은 기준과 배경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재고할 여지가 있다. 시기적 특성은 외교의 관행, 제도의 운용 등을 통해 분석해야 하며, 이에 따라 변화의 계기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 문제는 ‘전형’을 강조하면 할수록 조선의 입장 및 외교 활동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 왕조가 정해진 예제를 무조건 시행하기보다, 대외정세 및 국력에 따라 선택적으로 천하의 범위와 조공국에 대한 개입 여부를 결정했다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청의 국제관계에 대해 예제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연구를 비판하는 동시에, 현실적 상황을 고려한 외교가 시행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조선·청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청이 규정한 의례의 위계에서 조선은 명백히 하위에 위치했지만, 위계로 인해 조선이 청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청이 현실적 이익을 고려하여 조공국을 대했다면, 조선 역시 능동적으로 조선의 이익을 추구한 측면이 있다.
이렇듯 기존 조공책봉관계의 핵심 지표라고 여겨졌던 요소들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조선과 청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가 본 연구의 과제이다. 조선이 청 중심의 의례 절차를 준수하고 정례적으로 사신을 파견했다는 점을 보면 양국 관계는 ‘전형성’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어떠한 관계도 고정된 제도만을 가지고 운영할 수는 없다. 대외관계에서 생기는 다양한 변수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기에 따라 제도에 없는 조치를 취했거나 혹은 제도를 변용하여 특정한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라고 보는 편이 논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250여 년 동안 지속되었던 조선·청 관계 속에서 전쟁으로 시작된 양국 관계가 안정 국면으로 접어든 18세기의 특성, 근대라는 파고로 인해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 19세기의 상황 모두를 아울러 살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위계 관계에서 조선이 자신의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측면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이 책에서는 위와 같은 문제에 대한 효과적인 분석을 진행하기 위해 조선에서 청에 파견한 사신(使臣)과 재자관(齎咨官)에 주목하였다. 이들은 조정의 의사를 상대국에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동시에 다른 측면들도 있다.
사신은 군주의 명령 또는 명령문서를 지니고 가서 상대 군주에게 전달하는 관원을 말한다. 조선의 사신은 정사(正使)·부사(副使)의 직함을 띠고, 정기·비정기적으로 북경에 파견되었고, 조선국왕이 황제에게 보내는 표문(表文)과 주문(奏文) 등의 외교문서와 함께 예물 즉 방물(方物)을 지참하였다. 이러한 사신들의 파견을 사행(使行)이라고 한다. 한편 재자관은 역관(譯官)을 책임자로 삼아 파견하는 방식이다. 외교문서인 자문(咨文)을 가져간다는 의미에서 이를 재자관이라고 불렀다. 자문의 발신자는 조선국왕, 수신자는 대부분 청 예부(禮部)이며 이에 수반하는 방물은 없었다. 드문 사례이지만 주문(奏文)을 지니고 파견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은 재주관(齋奏官)이라고 불렀다. 재자관은 사신보다 위상이 낮았지만, 소수의 인원만 신속히 파견한다는 점에서 경제적·시간적으로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빈번하게 활용되었다. 재자관(또는 재주관)의 파견을 재자행(齋咨行 또는 齋奏行)이라고 한다.
사신 및 재자관을 분석 대상으로 설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신과 재자관은 조선·청 양국의 조공책봉관계가 시작되는 인조 15년(숭덕2, 1637)부터 관계가 해체되는 고종 31년(광서20, 1894)까지 북경으로 파견되었다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청 조정이 심양에 있던 인조 15~22년까지는 정월 초하루 정조(正朝)와 황제의 생일에, 청의 북경 천도 이후에는 정조 행사에 빠짐없이 사신을 파견하였고, 이는 청일전쟁이 발발한 고종 31년까지 지속되었다. 이외에도 청의 경조사 및 조선의 해명 또는 요구사항이 있을 때마다 비정기적으로 사신과 재자관을 보냈다.
---「1. 문제제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