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라는 단어가 주는 다양한 느낌이나 의미가 전부 마음에 든다. 죄의 대가로서의 공간, 우울한 곳, 신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공간, 무신론자가 가는 곳,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적인 증거를 확인할 수 있는 곳, 시끄러운 곳,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 무서운 곳, 안전한 곳, 자꾸 생각나는 곳, 고문당하는 곳, 빠져나올 수 없는 곳, 빠져나와야만 하는 곳, 녹조가 낀 해변, 젖과 꿀이 넘치는 곳, 잊어버린 기억, 다른 차원, 땅 밑에 있는 세상, 하얀 방, 지금 바로 여기, 기다리는 곳, 영원히 일하는 곳, 영원히 쉬는 곳, 낙원의 다른 이름 등등…… 문제는 이렇게 많은 느낌이나 의미를 내가 개별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거다. 지옥을 호명하거나 느낄 때, 나는 종종 이 모든 정보들을 한꺼번에 소환한다. 지옥은 엉망진창이다. 나는 항상 내 시의 화자가 지옥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매번 그들에게 거긴 아직 지옥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지옥보다 더 아래』는 내 화자들이 가야 하는 곳에 대한 책이다.
---「지옥보다 더 아래」중에서
세 사람이 딱이다. 네 사람은 너무 많다. 그래서 삼총사라는 말이 있는 것 같다. 지옥엔 항상 한 테이블에 네 사람 이상 모여 있을 것이다. 모여 있다…… 지옥에선 모여 있다. 아마 딱 네 사람만 모여 있는 일이 잦을 것이다. 한 고문대에 네 사람이 모여 있을 것이다. 군중의 지옥도 괴롭겠지만 세 사람을 초과했다는 것을 가장 잘 알게 해주는 것은 네 사람이니까. 네 사람의 지옥이 있을 거다. 네 사람이 되는 순간, 삼총사가 아니게 되는 순간(물론 뒤마의 삼총사는 네 사람이다), 우리는 나머지 한 사람이 꺼져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내가 유년을 보낸 곳은 과천이라는 소도시였고, 거기가 바로 양재천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양재천의 발원지는 관악산이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 과천에서 강남으로 천이 뻗어나가기 시작하는 곳에서 우리는 놀았다. 정확히는 나를 제외한 셋이 먼저 와서 놀고 있었다. 나는 먼저 놀고 있는 셋 중의 둘과 내가 가장 친한 친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늦게 도착하고 보니 자기들이 삼총사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놀고 싶으면 놀아도 괜찮아. 하지만 그래도 우리들만이 삼총사라는 것은 바뀌지 않지. 나는 그중 한 명의 명예를 실추시켜서 내가 다시 삼총사에 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속상함을 무릅쓰고 양재천에 들어갔다.
---「양재천」중에서
그가 처음 내 앞에서 죽으면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나는 “당연히 나무가 되면 좋지, 나무는…… 어쩐지 좋은 존재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선생님이 나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바랐던 건 아니었다. 반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저절로 튀어나왔다. 형언할 수 없는 적의였다. 나는 내가 왜 그렇게 선생님이 나무가 되는 걸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그냥…… 이유 없이 나무가 싫었다. 선생님이 죽고, 자살자의 숲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의 사다리라는 개념을 통해 자연의 모든 물체를 계급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가 식물을 동물보다 아래에 둔 것을 알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윤영선의 학생이었다면,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이유 모를 적의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있었겠지. 나무는 식물이니까. 그래서 그냥 선생님이 나무보다는 거북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자살한 자들의 지옥」중에서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이나 대단한 예술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내 생각에 아름다움이란 엄청나게 멋진 게 아니라, 아주 조금 좋은 것에 불과하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아주 조금 좋은 것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아주 조금 좋은 것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싫지 않다. 하지만 여행의 대단원에서 아주 조금 좋은 것을 만났을 때의 기분은 그야말로 끔찍하다. 옆에 낭만적인 사람이 있다면 더더욱 끔찍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낭만적이고, 나를 슬프게 한다. 그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아름다움」중에서
한국의 대형 종교 건물은 마치 대학교 건물 같다. 한적한 시간이나 계절에는 그 넓은 공간이 전부 버려진 채 존재한다는 것이 닮았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오후 6시 이후의 대학교 건물은 아주 쓸모없다. 대형 교회나 현대식 사찰은 일요일이 아니면 거의 텅텅 비어 있다. 그래도 종교 건물이 대학 건물보다 나은 건, 종교 건물은 텅텅 비어 있는 시간에도 뭔가 신비로운 아우라를 풍긴다는 거다. 대학 건물은 언캐니할 때가 종종 있는데, 종교 건물엔 포근함이 있다. 어쩌면 난방이 잘 되어서일까. 그것도 맞지만 뭔가가 더 있다. 외부인은 모른다. 한국의 대형 종교 건물은 지루하고 아늑하다. 문제는 그 아늑함을 속 편히 즐길 수 없다는 데 있다. 뭔가 끔찍한 것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국의 대형 종교 건물에선 내부인도 결코 내부인이 될 수 없다. 대형 종교 건물에는 항상 우리가 알 수 없고, 갈 수 없는 어떤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실거주 공간 낭비 지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