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감수성은 ‘생명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마음’ 정도로 뜻풀이를 하는 것이 좋겠어. 더 풀어 쓴다면 세상 그 어느 가치(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돈, 명예, 권력, 편안함, 편리함…)도 생명보다 위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바로 생명감수성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 생명감수성은 결국 생명체를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대하느냐의 문제야. 그러니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어. 따라서 생명감수성을 말하며 모든 생명을 다 똑같이 좋아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을 거야. 그럴 수 없거든. 나도 모든 생명을 다 좋아하지는 못해. 무서워하는 것도 있고, 싫어하는 것마저 있어. 하지만 싫어한다고 마음대로,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잖아. 생명감수성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해.
--- 「생명감수성이란 뭘까?」 중에서
인간만이 식물의 영역, 곧 녹색의 세상을 짓밟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저들의 자리를 빼앗음으로써 우리가 얻은 것은 편리함이야. 하지만 이제는 선택해야 해. 조금 편하게 잠시 살다 식물을 잃고 나도 잃을 것인지, 아니면 조금 불편하게 살더라도 모두와 함께 살아갈 것인지. 그나마 지금은 선택지라도 있지만 이대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우리에겐 선택할 기회조차 없을 수도 있어. 식물 훼손의 끝은 모든 생명의 절멸이니까.
--- 「훼손되어지는 녹색의 세상」 중에서
그런데 동물자유연대에 따르면 2022년에 발생한 유실?유기동물은 11만 2천여 마리며, 해를 거듭할수록 그 수가 증가하고 있대. 지자체 보호소에 들어온 유기동물의 대부분이 보호소에서 안락사로 생을 마감하고 있으며, 훈련이나 치료 등은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이야. 우리나라의 경우 반려동물을 입양하여 죽을 때까지 키우는 비율이 겨우 12퍼센트 정도이며, 나머지는 도중에 재분양 또는 유기된다고 해. 어림잡아 열에 아홉은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고 버려지는 셈이야. ‘반려’라는 표현을 쓰기 민망한 형편이지.
--- 「버려지는 반려동물」 중에서
지구에 있는 생명체 중에서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는 생명체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딱 둘이야. 나그네쥐와 사람. 그만큼 자연세계에서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는 거지. 그런데 레밍과 사람의 자살 사이엔 큰 차이점이 하나 있어. 사람에겐 각자 분명한 자살 이유가 있다는 거야. 즉, 이유가 있으니 막을 방법도 있겠지.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서 1위를 차지하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자살률이야.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2010년 이후로 줄곧 1위를 하고 있어. 특히 우려되는 점은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매우 높다는 거야. 청소년의 사망 원인 중 1위가 자살이기도 해. 정말 놀랍고 안타까운 현실이지.
--- 「스스로 포기하는 생명, 자살」 중에서
먹이사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 A가 B를 먹는다 하여 A가 B보다 높은 지위에 있진 않다는 거야. 앞의 먹이사슬에서 삵이 최고 상위 포식자라고 말하지만, 삵이 최고의 지위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야. 삵도 결국 죽잖아. 사체는 미생물에 의해 분해돼 결국 콩과 벼의 일부가 되고 말이야. 먹이계단이 아니라 먹이사슬이야. 사슬이니 순환해. 순환은 단절이 아니라 연결이고.
--- 「먹이사슬은 관계성이야」 중에서
생명감수성을 어떻게 키우면 좋을지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로 무엇을 들려주면 좋을까 참 많이 고민했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지. 그러다 마침내 하나에 이르렀어. 결국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전해 주는 게 중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어. (…) 나의 이웃은 누굴까? 또 다른 사람, 자연이 품은 동물, 자연에 깃들인 식물, 보이지 않는 미생물도 나의 이웃이야. 크든 작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움직일 수 있든 없든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차별하지 않으면 좋겠어. 작다고 하찮게 여기지 말고,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 여기지 말고, 움직일 수 없다고 함부로 대하지 말자는 뜻이기도 해.
--- 「결국엔 사랑이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