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만나고 알게 된 이야기 덕에 나는 공장과 주방과 농장이 모든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떡집이 왜 아직도 아침부터 문을 여는지, 달라진 현대인의 식생활은 떠먹는 요구르트 시장을 어떻게 바꾸는지, 우리가 무심코 사 먹는 햇반이 어떤 하이테크의 산물인지, 값비싼 문어를 위해 누군가가 바다 위에서 어떤 일을 하며 그 경험을 일반인이 해 보면 어떻게 되는지,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 p.10, 「서문 ‘주방 속으로’」중에서
밥을 만드는 공정 자체에서 사람이 하는 일은 없다. 모든 일은 기계가 한다. 빈 햇반 그릇의 포장을 까는 일부터 다 만들어진 햇반을 물류창고로 들여보내는 일까지. 이건 생산성의 문제인 동시에 위생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포장지를 밀봉하는 포장실은 한결 더 예민해서 이곳에만 수술실 수준의 헤파필터와 포장실 전용 로봇팔이 따로 설치된다. 이만큼 효율적이고 깨끗한 공장 안에서 만들 수 있는 햇반은 하루에 90만 개에 이른다. 햇반 공장이 자리한 충북 진천의 인구가 약 8만 7천 명이다. 진천군민 1인당 열 개씩 받아갈 수 있는 양을 하루에 만들 수 있다.
--- p.24, 「1장 ‘거대한 주방 - 식품 공장’」중에서
반죽은 평평한데 왜 면은 꼬불꼬불할까? 튀길 때 꼬불해질까? 아니다. 그렇게 치면 감자튀김이 어떻게 일자겠나. 우리가 꼬불해지는 건 제면 과정에서부터다. 반죽이 들어가는 롤러가 있고 나가는 롤러가 있다. 그 두 개의 롤러의 속도 차이를 주면 우리의 모습이 꼬불꼬불해진다. 속도 차이를 통해 꼬불거리는 정도도 조절할 수 있다. 신기하지? 안 신기하다고? 다들 호기심이 별로 없구만. 아무튼 우리는 여기서 모습을 갖춘 후 어딘가로 떨어진다. 거기 뭐가 있냐고?
--- p.68, 「1장 ‘거대한 주방 - 식품 공장’」중에서
오늘 찾은 곳은 지금까지 찾은 식품 공장 중 가장 독특한 공장이다. 우리는 이것을 먹지만 이걸 식품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대규모 식품 공장인데도 딱 하나의 재료만 쓰고, 식품 공장인데도 1년에 3개월은 가동하지 않는다. 얼핏 들으면 이걸 만드는 데 노하우가 있으려나 싶으면서도 실제로 가서 보니 역시 또 대단한 노하우가 있었다. 우리가 찾은 곳은 춘천 당림리에 있는 풀무원 얼음 공장이다.
--- p.127, 「1장 ‘거대한 주방 - 식품 공장’」중에서
어찌 보면 와인과 같다. 와인의 재료인 포도의 맛이 테루아에 좌우되듯 치즈의 재료인 원유의 맛은 결국 젖소의 사육 환경에 따라 변한다. 그 원유에 어떤 유산균을 첨가하고 어떤 숙성을 시켜서 맛을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환경? 위도나 경도? 값비싼 시설? 다 아니다. 생산자의 입맛이다. 변수는 무한하기 때문에 생산자가 상황에 맞추어 어떤 맛을 추구하는지가 중요하다. 그 결과 한국의 치즈는 서양의 치즈보다 짠 맛이 덜해진다. 한국 우유와 서양 우유의 지방함량이 다르고, 한국인이 서양인보다 덜 짜게 먹기 때문이다.
--- p.187, 「2장 ‘새로움과 배움의 주방 - 식품 연구소/교육원’」중에서
“중국 사람들이 오래 버티고 한국 사람들은 오래 못 버텨요.” 세 명 중 유일하게 한국어를 하는 남자가 말했다. 그 역시 화교고, 중국어를 할 줄 알아서 이 일을 시작했고, 전에는 다른 일을 했으며, 이름을 밝히지는 말라고 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물었더니 그는 면장이라는 호칭을 알려 주었다. 그가 면을 뽑기 때문이었다. 보통 중국집에서도 면을 뽑는다. 마케팅 때문이 아니라 효율을 위해서. 면 상태로 된 걸 보존하느니 제면기를 하나 두고 주문이 들어오면 1인분을 뽑는 게 빠르다. 촬영을 위해 간짜장을 부탁드리자 조리사와 면장 2인조가 함께 움직였다. 조리사는 짜장 40인분을 다 만들고 바로 씻어서 깨끗해진 웍 위에 다시 한번 양 파 한 바가지를 붓고 볶기 시작했다.
--- p.275, 「3장 ‘프로의 주방 - 식당’」중에서
“늘 3시에 일어나요.” 속사정을 듣고 이들의 침묵을 이해했다. 2인조의 침묵은 무뚝뚝함이 아니라 에너지 보존이었다. 떡집은 고된 일이다. 새벽부터 떡을 찌고 쇼케이스를 채우면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떡을 사서 나간다. 비는 시간에는 명절에 집중적으로 나가는 송편을 미리 빚어 둔다. 그렇게 시지프스의 바위 같은 떡집의 하루가 간다. 10시쯤 주무시고 3시쯤 일어나는 하루가 끝없이 반복된다. 너무 조금 주무시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닭처럼 졸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 p.294, 「4장 ‘달콤한 주방 - 떡집과 빵집’」중에서
청도 미나리는 맛뿐 아니라 앞으로의 삶에도 교훈을 준다. 일의 모든 영역에서 사람의 역할이 줄어들고, 전국의 지자체가 인구 소멸을 걱정하는 시대다. 그 사이에서 벽촌에 가까운 청도의 어느 마을이 다른 것도 아닌 미나리로 전국 단위의 인지도를 얻었다. 중요한 건 시대가 아니라 시대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노력 아닐까. 그 증거 중 하나는 김성기의 손이었다. 그의 손톱과 손가락 마디마다 흙이 껴 있었다. 평생 진흙을 만진 흔적이었다.
--- p.364, 「5장 ‘살아 있는 주방 - 농장’」중에서
“돌아갈까요?” 김귀봉이 신사적으로 물었다. 처음엔 거절했다. 조업에 방해가 될 순 없다. 우리의 조업도 중요했다. 문어 낚시 사진을 얻고 싶었다. 그런데 파도가 높아졌다. 배는 계속 빙빙 돌았다. 어느새 사진가 신동훈도 내 옆에 쓰러지듯 앉았다. 이런 상황에서 배를 몰고 낚시 도구를 던지는 김귀봉은 바다의 신사가 아니라 바다의 신처럼 보였다. 김귀봉은 우리가 작동 불능 상태임을 아는 듯했다. 그는 낚시 도구를 몇 개 더 던지고 한 번 더 물었다. “돌아갈까요?”
--- p.425, 「5장 ‘살아 있는 주방 ? 농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