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애중심적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힘든 일이다. 나도 이 행성에서 살아온 반백 년간 많은 일을 해내야 했다. 나는 책, 영화, 텔레비전에서 나와 닮은 사람의 이미지를 거의 못 보고 자랐다. 그런 부재 속에 놓인 사람은 뭔가가 빠졌다는 것을 어떻게 깨닫게 될까? 2019년에 휠체어를 탄 어린 소녀가 상점 밖에 붙은 화장품 광고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사진 한 장이 화제가 됐다. 광고 속 여성도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결국 실제로 만났다. 이 이야기는 내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게 했다. 당시 내가 나와 비슷하면서도 매력적이고 당당한 성인을 봤다면 내 세계관은 달라졌을까? 나이가 든 후, 장애인 커뮤니티를 찾아내고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점점 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 p.17, 「앨리스 웡, 〈들어가며〉」 중에서
싱어는 나같이 철저한 무신론자가 어떻게 자신의 완전히 합리적인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지 궁금한 것 같았다. 동시에, 나는 그의 이론들을 파헤쳐 보려고 노력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확신하게 하는 것일까. 중증장애가 있는 아기를 죽이는 선택을 하는 게 부모에게는 최선이라고 말이다. 영아는 살 권리를 가진 ‘인격체’가 아닌데도, 장애가 아닌 다른 특성을 가진 아기와 관련해서는 그렇게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생물학적 부모들과 입양 부모들 모두 건강한 아기를 선호한다는 것이 그 확신의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나는 시장 자체가 편견으로 구조화된 상황에서, 이 시장을 감안해 생사를 건 결정을 내리는 것은 문제라고 여긴다. 나는 가설 비교를 제안한다. “부모의 인종이 다른(mixed-race) 아기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특히 완전히 비백인이면 장애가 있는 아기만큼이나 입양이 잘 되지 않을 텐데요?” 싱어는 그런 경우 (영아살해를 적용하는 것은) 문제라고 동의한다. “아기들이 백인이 아니어서 입양이 안 된다는 이유로 죽임당한다면 끔찍하겠네요.” 그럼 무엇이 차이점인가? 인종에 기반한 선호는 비합리적인데, 장애에 기반한 선호는 합리적인 이유는? 싱어의 논리에 따르면 이유는 단순하다. 장애라는 특성이 삶의 질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질이 낮다고?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화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다. 장애를 선천적으로 타고난 경우, 장애 자체가 그 자신을 형성한다. 후천적으로 장애가 생긴 사람들은 변화에 적응한다. 우리는 장애를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그로 인한 제약들을 감수하며 그 안에서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일궈왔다.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기쁨은 물론, 우리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만끽한다. 우리는 세상에 필요한 뭔가를 가지고 있다.
--- p.40~41, 「해리엇 맥브라이드 존슨, 〈말로 다 할 수 없는 대화〉」 중에서
pp.64~65
내가 만약 싱어가 갖고 있는 장애에 대한 편견을 궁극적인 악으로, 그를 괴물로 정의한다면, 장애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질이 낮다거나 특정한 의식이 없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정의해야 한다. 그렇게 정의해버리면 거리에서 만나고, 함께 일하고, 빵을 나누고, 서로 이야기하고, 지역 정치의 고단한 일들로 얽혀 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괴물’이 될 것이다. 내 가족과 비장애인 친구들, 나에게 개인적으로 친절을 베풀고 때론 자신의 무지를 넘어서며 나를 좋아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나는 그들 모두를 아우르는 궁극적인 악의 정의(definitions)만으로는 살 수 없다.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닌 기본적인 존중과 인간적인 연민을 통째로 거부할 수는 없다. 내 마음은, 내가 지닌 사랑은 그들 하나하나를 단호히 부정하지 않는다.
내 인생의 드라마는 나 같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세상 속에서 쓰였다. 그것이 이 드라마만의 특징이다. 나의 투쟁은 나를 대하는 세상을 향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나를 향한 것, 협상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 p.64-65, 「해리엇 맥브라이드 존슨, 〈말로 다 할 수 없는 대화〉」 중에서
사이보그로 정체화하는 건 두려운 일이다. 당연히 틀릴 수 있다. 지난 세기의 사이보그 개념의 잔해에 맞서 나 자신의 현재를 정의하는 동시에 미래까지 내다보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사이보그라고 말하는 게 “장애인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이야기를 ‘섹시하게’ 하는 방법에 불과할까봐 걱정된다. (내가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또 사이보그가 사람들에게 영화 속 슈퍼히어로여서, 이종격투기 선수여서, 삶을 편하게 해주거나 모든 걸 망쳐버리는 로봇이어서, 비장애인의 환상이 투사된 너무 대중적인 개념이어서 걱정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이보그를 겸하는 장애인들을 주목한다.
사이보그 간에도 위계가 있다. 사람들은 우리 중 생체공학 팔과 다리를 가진 이들을 가장 좋아한다. 청각장애인 당사자는 인공와우 이식술을 선호하지만, 사람들은 보청기를 착용한 농인을 좋아한다. 비청각장애인에게 수화를 배우라고 하면 모욕으로 받아들일 거면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언어를 잃고 문화를 포기하면서 스스로 치유되었다고 생각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실제로는 아무도 쓰지 않는 외골격 로봇을 좋아한다. 심박조율기를 삽입했거나 정기적으로 투석을 받는 이들은 사이보그로 치지 않는다. 생명유지장치를 달고 있거나 휠체어로 이동하거나 생물학적 제제와 항우울제에 의존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원하는 사이보그의 이미지는 정해져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속성의 존재다.
사이보그는 엔지니어의 꿈이다. 엔지니어는 인간이 더 큰 성능을 발휘하도록 조종한다. 평범한 사이보그인 나는 그 꿈이 못마땅하다. 나는 그런 꿈이 담긴 물건은 하나도 팔아주고 싶지 않다. 나는 내 다리, 그들이 3C98이라는 품번을 붙인 윙윙 돌아가고 찰칵거리는 이런 테크놀로지에 감동하지 않는다. 내가 몸무게를 45에서 47킬로그램 사이로 유지해야만 맞는 소켓이 장착된 이 다리로 나는 63만8천402보를 걸었다. 하지만 이 다리는 불량품이다. 시행착오의 감각, 일시적 오류의 반복은 사이보그로 사는 삶의 일부다. 확장해보면, 장애화된 삶의 상태다.
--- p.112-113, 「질리언 와이즈, 〈평범한 사이보그〉」 중에서
장애인이나 트랜스젠더가 스타일리시하게 혹은 요란하게 옷을 입는 것은 문화적으로 권장되지 않는다. 사회는 우리가 이목을 끌지 않고 ‘섞여서 눈에 띄지 않기(blend in)’를 원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투명 인간으로 만들려는 사회 분위기에 저항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우리가 집단적으로 패션을 개혁해 동화(同化)되기를 거부한다면?
리버스 가먼츠는 일반적인 미의 기준에, 사이즈와 장애라는 개념에, 그리고 성별 이분법에 도전한다. 옷은 제2의 피부이며, 우리가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을 바꾼다. 나는 모든 옷은 일종의 갑옷이라고 생각한다. 입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몸으로 편안하게 존재하는 데에서 비롯하는 자긍심과 강인함을 북돋을 힘이 옷에 있기 때문이다.
--- p.158-159, 「스카이 쿠바컵,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장애인-퀴어의 패션 개혁 운동 선언〉」 중에서
내 책은 매디의 손과, 장애가 있고 뛰어난 그의 뇌로 만들어졌다. 한 쪽 한 쪽, 내 손자국과 그의 지문이 겹쳐 있다. 이것이 장애문학(disabled poetics)이다. 장애인의 실천 방식(disabled praxis)이자 연립이다.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그의 도움으로 해냈다. 많은 장애인들이 이렇게 돌봄을 주고받는다. 내가 장애를 갖기 전에는, 이런 종류의 사랑에 대해서는 결코 알지 못했다. 장애인들이 서로 나누는 사랑은 치열하고, 인내하고, 다정하며, 희귀하다. 그것은 비장애중심적인 세상이 우리에게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이상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그 사랑에는 슬픔과 고통, 그리고 저항이 있다.
“서로를 돌보는 장애인들은 깊은 치유의 자리에 있다.”고 레아 락시미 피에프즈나-사마라시냐는 《돌봄 노동: 장애 정의를 꿈꾸며(Care Work: Dreaming Disability Justice)》에서 썼다.
우리의 뇌는 둘 다 고장 났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종종 서로의 한계를 보완해준다. 우리는 또한 치유와 애도를 향한 퍼즐의 다른 조각을 쥐고 있으며, ‘장애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장애 덕분에’ 사랑받고 돌봄받을 수 있는 세상과 미래를 상상하도록 서로를 돕는다. 우리는 그런 돌봄을 요청하고 기대하는 법,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법, 장애인 간 연대의 아름다움을 서로에게 가르치고 있다.
--- p.237-238, 「A.H.리움, 〈내 소설을 친구 매디에게 바치는 이유〉」 중에서
장애인이면서 임신중지 합법화에 찬성하기는 쉽지 않다. 내가 신체적 자율성에 보내는 지지가 나 같은 아기는 낳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선택에 대한 지지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정말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토론해야 한다.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가 우리 없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일을 결정할 권리가 장애계에서는 핵심 원칙으로 여겨진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저신장 장애의 가장 흔한 형태인 연골형성부전증이 있다. 그들은 임신을 시도할 때 아기가 출생 직후 사망할 확률이 얼마나 높은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골형성부전증을 일으키는 유전자(FGFR3)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던 시기여서, 내가 태어나기까지 그들은 세 번의 임신과 세 번의 베이비샤워[임신부가 출산을 앞두었을 때 친지들이 모여 아기용품을 선물하는 파티], 그리고 세 번의 유산을 겪어야 했다. 트라우마는 오래갔고 부모님의 결혼 생활에 미친 영향도 컸다. 그래서 엄마는 임신중지를 지지하고, 선택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임신중지 시술에 대한 접근성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에서 장애가 프레이밍되는 방식은 매우 유감스럽다. 장애인 커뮤니티의 삶이 의료 산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이런 법안으로 장애인을 낳지 않을 의료적 선택지를 제거한다고 해서 장애인의 삶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 p.247, 「레베카 코클리, 〈당신이 듣지 못한 임신중지 금지 법안〉」 중에서
많은 비장애인들은 장애를 어딘가 망가진 상태로 보는데, 이는 우리의 신체와 정신에 대한 의료화(medicalization)[비의학적 현상으로 취급되던 문제를 질병으로 재정의하여 의학적 개입의 영역으로 포함시킴으로써 의료전문가의 권력이 확대되는 사회적 과정]의 결과다. 이 세상에서 장애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구분하는 신체 그리고/혹은 정신이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겪는다는 뜻이다. 나는 나에 대한 진단들 속에서 내 신체를 익히고 살아가는 법을 찾아왔다. 나는 코벳 오툴(Corbett O’Toole)이나 시미 린턴(Simi Linton) 같은 학자들과 장애학 책으로부터 장애를 배웠다. 장애학에 입문하면서 나는 장애가 내 신체 상태를 넘어서는 뭔가라는 것을 알게 됐다.
무용은 나에게 내 신체를 이전과 다르게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무용수로서 나의 첫 과제는 내 휠체어를 마스터하는 것이었다. 나는 휠체어 안에서 움직이는 법을 익혀야 했을 뿐 아니라 흑인 여성이 무대와 스튜디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휠체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해야만 했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여러모로, 내 관점이 아닌 기술적 관점에서 휠체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배우는 게 더 쉬웠다.
밀고 당기는 단순한 움직임도, 집중하다 보니, 생각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휠체어를 나로부터 분리된 사물이 아닌 내 몸의 연장(extension)이라고 생각했을 때, 한 번에 쭉 밀고 나가는 동작이 더 잘 됐다. 나는 신체와 휠체어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인터넷을 뒤졌지만, 내가 그나마 찾아낸 것은 휠체어를 ‘장치’, ‘도구’, ‘테크놀로지’로 지칭함으로써 그 낙인을 벗기려는 시도뿐이었다. 나는 스스로 “휠체어는 다리”라고 정의해봤다. 하지만 이런 비유는 항공사에 휠체어 파손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을지언정 댄스 스튜디오에서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았다. 휠체어는 내 다리를 대체하지 않았다, 다리는 여전히 제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 체현이라는 개념을 발견했을 때 나는 또 한 번 인식의 전환을 경험했다. 그것은 내 신체가 형성되는 방식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내 휠체어를 내 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 p.251-252, 「앨리스 셰퍼드, 〈그래서. 망가지지. 않았다.〉」 중에서
크립 타임은 시간 여행이다. 장애와 질병은 규범적인 생애 주기의 선형적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에서 우리를 이탈하게 한다. 그리고 앞뒤로 가속되고, 멈췄다가 출발하느라 덜컹거리고, 지루한 간격과 갑작스러운 결말이 있는 웜홀에 빠지게 한다. 누군가는 아직 젊은데도 노년의 장애와 싸우고 있고, 누군가는 나이와 상관없이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다. 질병을 다루는 의학적 언어는 ‘만성적인’, ‘진행 중인’, ‘말기의’, ‘재발’과 ‘단계’ 등의 표현으로 선형적 시간성을 다시 부과하려고 한다. 하지만 크립 타임의 몸을 점유하고 있는 우리는 우리가 결코 선형적이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규범적 시간의 보호 구역에서 사는 사람들의 차분한 직설에 조용히 - 물론 그렇게 조용하지 않을 수도 있고 -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 p.284-285, 「엘런 새뮤얼스, 〈크립 타임을 보는 여섯 시선〉」 중에서
‘존경성 정치’[소수 집단이나 개인에게 주류/다수자적 사회의 기준에 맞는 방식으로 존중받을 수 있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 소수자 스스로 그런 행동과 인정을 갈구하는 것도 포함해서 이른다.]가 대중적인 전문 용어가 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 인간성과 장애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데 내 학위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유색 인종인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넘어서려면 너 자신이 두 배는 더 잘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다. 나는 내 삶에서 맞닥뜨리는 인종차별과 비장애중심주의 모두에 대처하기 위해 그렇게 해왔다. 나는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싶었고, 고등 교육을 받는 게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나는, 로스쿨을 나온 후 변호사로 살아온 2년간의 기간이 내 인생에 얼마나 큰 함정이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이 사회, 이 도시, 그리고 이 세상에서 흑인이자 여성, 장애인으로서 온갖 난관을 헤치며 살아야 한다. 운전사가 내 눈앞에서 소변을 보겠다고 결정한 순간, 내가 느낀 공포와 당황스러움, 충격과 불쾌함 사이에서 나는 내 의뢰인들이 마주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누군가가 나를 존중하도록 만들 힘이 없다면 자신의 권리(혹은 가치)를 아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 p.318-319, 「브리트니 윌슨, 〈뉴욕의 대중교통에서 존엄을 위해 싸우기〉」 중에서
자본주의, 인종주의, 비장애중심주의, 성소수자 혐오가 지구 역사상 가장 예측 불가능한 이 시기에도 우리를 취약한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지만, 혐오에 대응해 우리가 얻은 지혜가 기후 위기에 맞설 힘이 되어줄 것이다. 퀴어, 트랜스젠더, 장애인의 역사는 우리의 필요를 배제하는 사회에서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온 일련의 과정이었다. 만약 우리가 상호교차적인 기후 정의 운동을 구축할 수 있다면, 우리 종에게는 생존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탈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존재임을 공공연하게 그리고 기쁘게 선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우리는 급성장 중인 퀴어 생태학에서 치유와 정의를 찾을 수 있다. 산호초 어류 중 50종 이상이 평생 한 번 이상 성전환을 한다. 성전환할 때 그들의 습성, 몸, 생식기관 전체가 바뀐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지구에는 모두의 생존에 필수적인 생물 다양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다. 최근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다양성이야말로 생태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 기후 위기에 대한 최선의 방어책이다.
자신의 다양성을 생태계 개념에 비추어 바라보기 시작하면, 지구에서 벌어진 여러 재난을 나란히 자본주의의 위협의 결과들로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성소수자나 유색 인종의 몸에 가한 폭력은, 자본주의가 식민지를 착취한 방식과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가 생물 다양성을 위협하는 방식(연료용 단일종을 심기 위해 숲을 벌채하는 등)은 그대로 장애인을 향한다. 우리의 몸이 ‘생산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소외시킨다. 부를 축적하려는 자본주의의 추동은 우리의 예측을 넘어섰고, 이미 우리 종에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분출하는 기후 혼란 속에서 우리는 지구의 저항을 목격한다. 우리는 질문한다. 어떻게 이 갈색 피부의, 퀴어인, 장애가 있는, 여성인 행성(지구)의 앨라이가 될 수 있을까. 지구와, 지구에 의존하는 모두의 생존을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을까. 기후 정의, 장애 정의, 퀴어 해방 운동 간 공고한 경계를 허무는 것은 사회구조와 제도의 무관심 속 부정의가 교차하는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 p.337-338, 「패티 번, 〈기후 재난에서 살아남으려면, 퀴어와 장애인을 보라〉」 중에서
우리가 그린 뉴딜 정책을 크립하게 만든다면(crip the Green New Deal) 어떻게 될까? 정책이 약속하는 그 모든 녹색 인프라와 일자리가 애초부터 장애 정의 원칙에 따라 설계된다면?
우리는 메디케이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지금의 돌봄 노동 구조는 너무나 저임금이고, 노동자와 이용자에게 모욕적이며, 많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콜렉티브 형태의 돌봄 구조를 확산시키려고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고립, 그리고 자신의 엉덩이를 친구가 아닌 타인이 닦아주기를 바라는 욕구, 친구나 사회적 자본의 부족, 혹은 아무리 조건이 갖추어졌다 해도 사람들이 지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참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꿈꾸는 콜렉티브 형태의 상호 지원 네트워크란 무엇일까? 자유롭고 정의롭고 문턱 없는 장애인 주도적 돌봄이 모두를 위한 인권이 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만약 우리가 장애 정의 원칙에 기반한 전 사회적인 상호 지원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어슐러 르 귄의 《빼앗긴 자들》에 나오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노동조합이 생산의 소유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나키즘] 달나라 같은 곳을 상상한다. 주택, 일자리, 의류와 생필품이 모두에게 제공되는 사회 말이다. 모두가 그런 식으로 돌봄에 접근할 수 있다면 어떨까? 돌봄과 접근성에 대한 권리가 헌법에 포함된다면 어떨까? 연방 정부, 시나 주 단위, 동네와 생태권역별로 적용되는 ‘돌봄 법’이 있다면 어떨까?
--- p.377, 「레아 락시미 피에프즈나-사마라시냐, 〈아직도 야생의 꿈, 세상의 끝에서 장애 정의를 꿈꾸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