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건물 발치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하며 노는지, 사람들은 쇼핑몰 레 트루아 퐁텐의 실내 통로를 어떤 모습으로 거닐고 버스 정류장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기다리는지 지켜보았다. RER에서 오가는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다시 보지 못할 장면, 말, 이름 모를 사람들의 몸짓, 벽에 그리자마자 곧 지워질 그라피티 들을 그대로 기록하고 싶었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내 마음속에 어떤 감정, 동요 혹은 반발을 촉발하던 그 모든 것을.
--- p.8
나는 이 일기를 1992년까지 써나갔다. 르포나 도시 사회학적 조사가 아니라, 집단의 일상을 포착한 수많은 스냅 사진을 통해 한 시대의 현실에 가닿으려는 시도라고 하겠다. 욕망과 욕구 불만, 사회 문화적 불평등이 읽히는 것은 바로, 내 생각엔, 계산대에 서서 자신의 쇼핑 카트에 담긴 내용물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비프스테이크를 주문하거나 그림을 평가하려고 입에 올리는 말들에서다. 고객에게 모욕을 당하는 계산원과 사람들이 피해 가는 구걸하는 노숙인, 사회의 폭력과 수치에서 ─ 너무 익숙하거나 흔해서, 하찮고 의미가 결여된 듯 보이는 그 모든 것에서. 우리가 세계에 대해 갖는 경험에 위계란 없다. 장소나 사물이 자아내는 느낌과 사유는 그것들의 문화적 가치와 무관하며, 대형 슈퍼마켓 역시 콘서트홀만큼 의미와 인간적 진실을 제공한다.
--- p.8~9
이제, 내면 일기를 쓰면서 자아를 성찰하기보다는 외부 세계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더욱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확신이 선다. 바로 전철이나 대기실에서 스쳐 가는 이름 모를 타인들이 흥미나 분노 혹은 수치로 우리를 뚫고 지나가며, 그러한 감정들을 통해 기억을 일깨우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를 드러내어 준다.
--- p.10
샤를 드골 에투알역, 조명 빛과 축축함. 여자들이 에스컬레이터 발치에서 장신구를 샀다. 통로에 분필로 테두리를 그린 자리가 있고, 바닥에 〈먹을 게 없습니다. 저는 가족이 없어요〉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표시해 놓은 남자 혹은 여자는 떠나고 없었고, 분필로 그어 놓은 원 안은 비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안을 밟지 않으려고 피해 걸었다.
--- p.24
레 리낭드 광장에서 아이 둘이 두 팔을 활짝 편 채 비행기 놀이를 한다. 둘 중 한 아이가 외친다. 흥분한 어조로, 〈난다, 날아!〉. 그러다가 피할 수 없는 필연을 확인하듯 숙명론자 같은 또 다른 어조로 덧붙인다. 「처박힌다, 처박혀.」 여러 번, 점점 더 빠르게, 아이는 뱅글뱅글 돌면서 만족스럽게 그 법칙을 되뇐다.
--- p.58
파리행 열차에서 남자가 젊은 여성에게 묻는다. 〈주당 몇 시간 일해요?〉, 〈몇 시에 근무 시작이죠?〉, 〈원할 때 휴가 낼 수 있어요?〉. 어떤 직업의 이로운 점과 불편한 점을 평가해야 할 필요성, 생활의 구체적 현실. 불필요한 호기심, 무미한 대화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앎으로써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살아올 수 있었는지를 알기.
--- p.59
사실을 마주했을 때, 두 가지의 행동 방식이 가능함을 깨닫는다. 정확하게, 꾸밈없이, 전체 이야기를 고려하지 않고 그 사실들과 순간 속에 드러난 그것들의 성격을 기록하거나, 그것들을 따로 간직하고 있다가 〈소용〉되게 만들고, 전체(예를 들면 소설) 속에 그것들을 편입시키기. 내가 여기에 써나가는 글들처럼 단편(斷編)들은 내게 미진한 느낌을 남기며, 나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구성 작업에 뛰어들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하지만 RER에서 보이는 장면들, 사람들의 자기 자신을 위한 동작과 말 들을, 비록 그것들이 아무 데도 소용되지 않는다 해도 옮겨 적어야 할 필요 역시 느낀다.
--- p.91~92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실추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철저한 사회적 고독의 제물인 저주받은 작가를 한참을 연기해 가며 말한다. (……) 현실의 고독은 그려 낼 말이 없으며,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 p.103
어떤 때는, 슈퍼마켓의 계산대에 줄 서 기다리는 여자에게서 어머니의 말과 몸짓을 다시 만났다. 그러니까 바로 바깥에, 전철이나 RER의 승객들과 갈르리 라파예트나 오샹의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사람들 안에 나의 지나온 삶이 침잠되어 있다. 자신들이 내 역사의 일부를 보유하고 있다는 의심조차 않는 무명의 사람들, 내가 결코 다시 보게 되지 못할 얼굴들, 육체들 안에. 아마도 거리와 상점의 군중에 섞여 든 나 역시 타인의 삶을 지니고 있으리라.
--- p.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