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에 다른 여성 호텔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으나 미국인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것은 바비즌이었다. 다른 호텔이 하나둘 문 닫은 뒤에도 바비즌만은 건재했는데, 그 까닭은 바비즌이 젊은 여성을, 1950년대에는 특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젊은 여성을 연상시키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바비즌은 엄격하게 여성 전용이었고 남자들은 로비까지밖에 들어올 수 없었다. 주말 저녁에는 로비가 ‘연인들의 오솔길’이라 불렸는데 전략적으로 배치된 화분 뒤 나뭇잎 그늘에서 커플들이 서성이며 부둥키곤 했기 때문이다. 은둔 작가 J. D. 샐린저는 ‘늑대’는 아니었지만 캐나다 하키 선수인 척하며 바비즌 커피숍에서 얼쩡거리곤 했다. 다른 남자들도 63번가를 걷다 렉싱턴 애버뉴가 나오면 느닷없이 피곤해져 당장 쉬고 싶은 생각이 들곤 했는데 마침 가까이에 있는 바비즌 호텔 로비가 휴식을 취하기에 아주 적합하게 느껴졌다. 《앤절라의 재》를 쓴 프랭크 매코트의 동생 말라키 매코트를 포함한 몇 명은 철저히 감시되는 객실층까지 계단을 통해 올라갔다고 주장했다. 그 밖에 어떤 사람들은 배관수리공이나 왕진 온 산부인과 의사로 가장하고 침투를 시도했다가 실패해 미시즈 시블리의 비웃음을 (그리고 분노를) 유발했다.
--- 「들어가며」 중에서
1차대전을 거치며 여자들이 자유를 얻었고, 1920년 수정헌법 제19조가 통과되며 참정권을 얻었을 뿐 아니라, 일하는 여성이 눈에 보이게 되고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대학에 진학하는 여성의 수가 급증했고, 여전히 결혼이 최종 목표이긴 했으나 플래퍼의 화려한 삶―도시의 흥청망청 소비주의(블루밍데일 백화점에서 쇼핑! 델모니코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과 결합된 사무직도 결혼 전 준비 과정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전에는 단순사무직이 처음 일을 시작한 젊은 남성이 위로 올라가기 위해 거치는 디딤돌이었다면, 이제 수천 명의 여성이 맨해튼 전역에 우후죽순 솟아오르는 번쩍이는 초고층건물 사무실로 몰려들면서 비서직은 승진 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직업이 되었다. 대신 이 일자리는 젊은 여성들이 ‘오피스 와이프’의 기술을 발휘하면서 월급을 받고 결혼 전 잠깐 독립적인 삶을 누릴 기회로 여겨졌다. 새로운 세상의 비서들은 사장들에게 “가능하면 사장 아버지 세대의 사라진 아내 비슷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포춘》 잡지는 말했다. 사장의 편지를 타이핑하고, 장부에 수입 지출을 기록하고, 사장 딸을 치과에 데려가고, 필요할 때면 사장의 자존감을 북돋는 입에 발린 말도 했다.
그 대가로 신여성도 무언가 얻은 게 있었다. 독립적으로 살고,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고(어느 수준까지만), 소비에 탐닉하고, 도시 생활의 짜릿함을 맛보고, 마음대로 공공장소에 들어갈 권리를 정식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살 공간이 필요했다.
--- 「1장 바비즌의 탄생」 중에서
1927년, 여전히 빅토리아 시대 기준에 따라 신여성을 비난하던 사회에서는 바비즌의 연주황색 벽돌벽이 이 안에 있는 여성들은 행동거지가 정숙하다고 보장했다. 이제 바비즌 호텔은 다른 종류의 비난으로부터 여자들을 안락하게 지켜주겠다고 했다. 여자는 일을 하면 안 되고, 일자리는 가장인 남자들의 몫이며, 일하는 여성은 비애국적이라고 간주하는 터라, 뉴욕에서 봉급을 받고 일하는 여자나 일자리를 찾는 여자는 모두 배척받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출근 복장으로 거리를 걷거나 사무실 건물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모습은 ‘남성성이 받는 위협’을 상기시켰다. 1932년이 되자 26개 주에서 결혼한 여성이 취직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여성이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도록 강제하지 않는 주에서도 여자가 결혼을 앞두고 있으면 반드시 밝히도록 의무화했다. 여자가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진짜’ 가장의 일자리를 뺏는 것은 부당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비즌은 이런 비난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제 바비즌은 단순한 레지던스 호텔이 아니라 안전한 피난처였다.
--- 「2장 대공황에서 살아남다」 중에서
그러나 바비즌 체류 동안, 아직 젊고 예쁘고 매력적이고 열의가 넘치는 동안에만 한정된 기회의 창이 열린다는 것을 뼛속 깊이 이해한 것은 상류층 출신들이 아니라 캐럴린 같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미모와 젊음 등의 자산을 밑천으로 비서, 모델, 배우 등의 일을 하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상류층 출신부터 캐럴린 같은 이들까지 바비즌에 있는 모든 젊은 여성에게는 같은 목표가 있었다. 바로 결혼이었다. 아무리 대담하고 아무리 포부가 드높은 사람이라도 무지개 끝에 있는 금단지는 결혼이라는 걸 누구나 알았다. 결혼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배우, 작가, 모델, 화가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있다 하더라도. 상류층 출신들은 적절한 배우자를 구하러 멀리 갈 필요가 없었으므로(아빠의 컨트리클럽이라든가 정기 댄스파티 등에 후보자들이 넉넉히 있었다), 이들에게는 바비즌이 결혼 전에 잠시 즐기기 위한 곳, 약간의 악명이나 성공을 누려볼 만한 시기를 뜻했다. 그러나 캐럴린 같은 이들은 뉴욕에서 그걸 이루기 위해, 다시 말해 뭔가 중요한 인물이 되어 남자를 만나기 위해 바비즌에 온 것이었다. 고향에는 캐럴린의 엄마 같은 이들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캐럴린들은 그것만은 죽어도 싫었다.
--- 「4장 인형의 집 시기」 중에서
1950년대는 장밋빛으로 기억되곤 하는 시기이다. 누군가는 미국이 이전이나 이후 어느 때보다 번영했던 때라고 한다. 그러나 1950년대는 모순, 입에 올리지 않는 것, 가식으로 가득한 시기였고 곧 그중 일부가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다. (…) 1950년대 여자들은 결혼이 성공 혹은 최소한 안전을 의미한다고 믿었으나, 그게 사실이 아닐 때가 많았다. 1950년대 바비즌에 살았던 여자들에게는, 좁은 방, 딱딱한 침대, 데이트 전 정신없이 옷을 차려입던 것,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나누던 대화, 심지어 미시즈 시블리의 잔소리마저도 나중에는 그리움의 대상이 될 터였다. 그들은 바비즌에서 보낸 시간이 결국 그들을 결혼이라는 궁극적 목표로 몰아갈 짧은 기회의 창이라고 이해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창이―그리고 그 시기를 정의하는 여자들의 동지애와 독립이―실은 그들 삶의 정점이었던 것이다.
--- 「4장 인형의 집 시기」 중에서
그럼에도 《마드무아젤》이 젊은 여성들에게 제공한 기회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마드무아젤》은 젊은 여성 독자들에게 시각적·지적 자극을 가감 없이 제공했고, 객원 편집자 프로그램으로 각 세대의 가장 야심 있는 젊은이들에게 권위 있는 출발점이자 도약의 발판을 제공했다. 남성이-백인 남성이-아무 도전도 경쟁도 없이 권력을 행사했던 1950년대에는 특히 더욱 소중한 기회였다. 이때는 남성의 지배와 여성의 복종이 완전히 당연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스크린에서는 1940년대의 존 크로퍼드와 캐서린 헵번 같은 걸출한 여성이 1950년대의 도리스 데이나 데비 레이놀즈 같은 명랑한 여성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크리스 래드가 지적했듯 “고등 교육은 남성의 전유물로 가꾸어져 소수 인종은 물론 여성과의 경쟁도 차단되었던 때다. 관리자, 교수, 입학 사정관이 거의 다 백인 남성이었다”.
이런 특권은 직업 세계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은행가, 변호사, 회계사, 공인중개사, 의사, 공무원… 모두 백인 남성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BTB와 대부분 여성인 직원들 그리고 젊은 객원 편집자들이 《마드무아젤》 사무실에서, 그리고 바비즌의 복도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두 곳은 여성이 (물론 백인 중산층 여성에 국한되기는 했으나) 자신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고, BTB처럼 지배할 수 있는 곳,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미모와 두뇌를 활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재닛 버로웨이가 회상하듯 이때는 아무도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던 때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의 엄격한 제약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6장 존 디디언」 중에서
각 세대마다 그 세대를 대표하는 커플이 있다고 재닛 버로웨이는 생각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로버트 브라우닝과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이 있었고, 플래퍼 시대에는 스콧과 젤다 피츠제럴드가 있었다. 1950년대 세대에게는 테드 휴즈와 실비아 플라스가 있었다. 실비아는 “여성운동이 시작되던 시기, 갇혀 있던 아내”였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멜로드라마틱하고 히스테리컬하다고 치부되었다.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객원 편집자들은 다들 “뛰어난 성취를 이룬 학생들”이었고, 실비아처럼 대단해지기를 꿈꿨고 그걸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으나 결국 결혼, 남편, 아이를 위해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토록 신성시되던 삶의 궤적의 끝에 가서는 이혼, 우울증, 그리고 역시 실비아처럼 자살성 사고를 마주하게 되었다. 실비아의 그림자가 정말 길게 드리운 셈이었다.
--- 「8장 “이름이 없는 문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