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한 곳에 방치되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하다. 특정한 곳에 시선을 두면 안 된다. 누구에게도 동조하지 않고 피곤한 기색으로, 두 팔을 원숭이처럼 늘어뜨린 채 서 있어야 한다. 그런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는 드물다. (……) 소란한 곳에 소란스럽지 않은 인간으로 멈춰 있을 때 나는 가장 안전하다.
그러므로 이곳은 나에게 최적의 공간이다.
나는 미도파 카운터에 서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안보윤, 애도의 방식」중에서
여자가 함박스테이크를 주문한다. 구운 파인애플을 도막도막 잘라놓고 먹지 않는다. 노른자를 터뜨려 끼얹은 고깃덩어리를 죄다 으깨놓고 먹지 않는다. (……)
음식에다 이게 뭔 짓이야. 너 진짜 모르는 사람 맞지?
몰라요.
나는 진심을 담아 말한다. 알 리가 없다. 이미 으깨진 것을 기어코 한 번 더 으깨놓는 사람의 마음 같은 건.
---「안보윤, 애도의 방식」중에서
처음엔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연수는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을 비밀로 했다. 작은 현판이 붙은 교실을 떠올릴 때마다 구토와 어지럼증이 솟는다는 걸,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호흡이 가빠진다는 걸, 교탁 앞에 서면 시야가 급격히 졸아들면서 머릿속에 암흑이 찾아온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수가 아무리 애를 써도 들키는 것이 있었다.
---「안보윤, 너머의 세계」중에서
계단을 내려가 중앙 현관에 있는 거대한 유리문을 열고 운동장으로 나가는 장면을 연수는 계속 상상하며 걸었다. 그것은 적어도 복도 창 너머 크고 단단한 돌덩이를 상상하는 일보단 나았다. 중앙 현관을 넘고 나면 이제 다시는, 어떤 문 안으로도 몸을 들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연수는 너머의 세계에 있기로 했다. 그것은 부끄러운 선택이 아니었다. 적어도 연수에게는 그랬다.
---「안보윤, 너머의 세계」중에서
한국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게는 절대 곁을 내어주지 않는 여행자들의 웃음소리가. 나는 잠시 후 그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며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누군가가 내 방문을 가리키며 저기 묵는 분도 한국인 아니에요? 하면 누군가가 심드렁하게, 그렇지만 약간의 멸시를 담아 받아친다. 아아, 그 부르주아 아줌마?
---「강보라,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중에서
호경은 그날 숫제 네발로 기어가는 시늉까지 하며 늑대 흉내를 냈고, 그 모습에 남자들이 허리를 꺾어가며 웃어댔고, 나는 그런 세 사람을 지켜보며 그들 사이에 섞이고 싶은 마음과 그들 사이를 엉클어뜨리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거듭했다.
---「강보라,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중에서
장희는 퀴어가 한 가족에 둘이나 셋이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느냐며 내게 퉁을 줬는데,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증조에 고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든 사돈에 팔촌까지 옆으로 뻗어가든 가계도를 샅샅이 뒤져보면 퀴어가 여럿인 집은 생각보다 많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러고는 또 하나의 사례처럼 자기 아버지의 외종사촌 얘기를 했다.
---「김병운,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중에서
나를 죽게 한 건 병이 아니고 사람이었다는 걸. 그러니 나를 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약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걸. 오늘 장희 군한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요. 삼촌은 절대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았다고. 곁에 있는 사람을 하루라도 더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 삼촌이었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고.
---「김병운, 세월은 우리에게 어울려」중에서
할머니는 아흔 살까지 호더로 살았고, 아흔한 살인 그때까지도 호더로 살고 있었다. 쓰레기로 가득 찬 집, 쓰레기와 죽은 쥐와 산 쥐와 죽은 벌레와 산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집. (……) 그 끔찍한 집은 그러나 평생 동안 내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내가 할머니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라는 것. 그러므로 할머니의 집은 어쨌든 내게 상속되리라는 것.
---「김인숙, 자작나무 숲」중에서
할머니는 쓰레기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 사람이니 나를 책임지기로 결정했을지도.
이런 스토리는 평범하지는 않으나 결코 비범하지도 않다. 세상에는 이보다 더 비범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니. 나는 평범하지 못한 사람의 손녀로 살아가면서도 결국에는 비범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운명을 가졌다는 뜻이다.
---「김인숙, 자작나무 숲」중에서
꽃이 있다고 치자고. 꽃이 있어서 벌도 있고 나비도 있다고. 꽃도 일을 하고, 벌도 나비도 제 일을 하고. 새벽에 나가서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고 치자고. 근데 꿀은? 여전히 꿀은 벌도 나비 차지도 아니지 않나? 그럼 그 꿀은 어디로 가는데?
허니쿠키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재 님! 꿀이 가긴 어딜 가요. 양봉업자에게 가겠죠.
---「신주희, 작은 방주들」중에서
나는 한동안 그림자처럼 앉아 소금 캐는 여자를봤다. 검은 피부에 날렵하고 단단해 보이는 팔, 일을 하는 데 허튼구석이 없는 손길.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가장 정확한 것을 움켜쥐는 동작이 반복되었다. (……) 나는 길게 늘어지는 여자의 그림자를 사진 속에 담았다. 말 대신 꼭 보여주고 싶었다. 진주에게 그리고 허니쿠키에게도. 마지막 실족에서 물러서게 하는 것, 걸음을 멈추고 끝 너머로 눈을 돌리는 것, 그게 최후에는 꼭 자기 자신이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신주희, 작은 방주들」중에서
1969년에 개업한 북명백화점은 30여 년간 흑자와 적자, 휴업과 리뉴얼을 반복하다 1999년 폐업할 때까지 동네의 가장 큰 명소였다. (……) 나는 북명이라는 단어의 신비한 느낌이 좋았다. 북명이라고 중얼거리다 보면 누군가의 이름이나 낯선 동네를 부르는 것 같았고 나중에는 북명이 하나의 호칭처럼, 이를테면 그 집 딸 북명 다닌다, 라는 식으로 사람들 입에 자연스럽게 오르내렸다.
---「지혜, 북명 너머에서」중에서
조옥에겐 아직 남은 새벽이 있었다. 나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어두운 밤이. 바깥을 살피던 조옥이 누군가 발견한 듯 반갑게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마침내 나는 조옥과 예전처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깊은 밤을 함께 보내듯이 커피를 나눠 마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혜, 북명 너머에서」중에서
할머니는 푸른색 봉투를 빙글빙글 돌려 매듭을 묶었다. 그러고선 검지에 흙을 조금 묻혀 ○ㅣ○ 아래 방긋 웃는 입 모양을 그렸다. 할머니는 이응의 이름이 이응인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건 세종대왕의 한글 사랑을 기리는 마음이라고 했다. 이응을 자세히 보면 동그라미 위에 꼭지가 달려 있는데, 그게 훈민정음에 있던 ‘옛이응’이라고 했다. 지금은 사라진 그 발음을 다시 살려내서 ㅇ과 ㅎ 사이의 소리를 사람들에게 찾아준 거라고.
“호.”
할머니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소리 냈다.
---「김멜라, 이응 이응」중에서
나는 이응 안에서 오래 포옹했다. (……) 레인코트, 당신의 이름은 무슨 색이죠? 나는 묻고 싶었지만, 입 속의 말들이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옛이응의 ‘호’가 아닌 지금 나를 가득 채우는 이 느낌을 표현할 새로운 언어가 필요했다. 더 깊은 품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우리의 스토리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김멜라, 이응 이응」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