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관전 포인트는 단연 서재다. 책이 주인공인 공간인 만큼 가구를 최소화하고 북 캣워크를 지지하는 인장 케이블과 천장 조명등, 핸드 레일까지 간결한 라인만 강조한 서재에서는 여느 도서관 못지않은 탁 트인 공간감을 경험할 수 있다. “욕심을 부렸다면 1층 복도 라인, 계단실 아래, 서재의 홀까지 모두 책장으로 채웠겠지요. 책으로 가득한 공간이지만 사실 책은 영감과 통찰을 주는 하나의 도구일 뿐, 목표나 목적은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생각’이죠. 신경 건축학에서는 빈 곳이 창의적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죠. 서재의 홀은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공간이에요. 사방을 두른 책장에는 영감과 통찰의 실마리가 가득하죠. 가끔 책을 찾으러 올라갔다가 엉뚱한 책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 앉아 한두 시간씩 보낼 때도 있는데, 바로 깨어 있는 정신으로 필요한 일에 몰입하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입니다.”
---「뇌공학자 정재승의 책으로 지은 집: 서재에서 생각 산책하기」중에서
서기 건축가는 최진석 교수의 우주를 만허당(滿虛堂)으로 펼쳐 놓았다. 스물여덟 평짜리, 가득 차고도 빈 집을 위해 다락을 올리고, 천장은 높게, 침실과 부엌은 작게, 창은 많이…. 그리하여 만허당은 글도 쓰고 작은 강의도 하고 명상도 하는 집, 공적 업무와 사적 일상이 어우러지는 집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 집은 ‘겸손하지만 당당한 집’이라는 과업에 성공했다.(…) 서기 건축가는 만허당 옆에 아버지의 창고 만복고(滿福庫)도 잘 고쳐 넣었다. “원래 아버지가 책도 두고, 쌀도 보관하던 곳이에요. 아침마다 밭에서 하나씩 돌 주워 오는 심부름을 시키셨는데, 그 돌로 지은 창고죠. 훌륭한 글씨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온갖 복이 들어오라’는 뜻의 만복고를 베니어합판에 먹물로 써서 걸었어요. 나중에 전각 작가 소봉 김충열 선생께 부탁해 새로 새겼죠. 그러고 보니 이 터도 아버지가 남긴 것, 만복고의 긴 창으로 보이는 뒤뜰에 있는 나무도 부모님이 심은 것, 만허당 현관 마루도 내가 뒹굴던 툇마루를 복원한 것이군요. 이 집과 터의 기억이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나의 현재 속에서 항상 함께 있는 느낌입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방향을 묵묵히 지켜봐 주는 아버지 같은 공간이죠.”
---「철학자 최진석의 만허당: 일상 속 철학이 시작되는 곳」중에서
건축가 조남호가 설계한 이 집은 단정하고 심플한 외관을 하고 있지만 재미있는 공간이 많다. 1층에 있는 한실도 그중 하나다. 침대 하나 들어갈 정도로 작은 방. 한지로 마감하고 창호 문을 달아 볕 좋은 날에는 순화된 빛이 잔잔하게 일렁인다. 작은 쪽문은 바깥마당과도 연결된다. 하이라이트는 건물 바깥쪽에서 그 작은 문 위로 올린 지붕. 얇은 철근으로 얼기설기 엮어 간단한 프레임을 만들고, 그 위에 작은 함석판을 올려 두었는데 보면 볼수록 아름답다.중정과 더불어 김정옥 작가가 아끼는 곳은 2층 서재다. 폭이 좁고 긴 테이블과 의자 하나만 있지만 쉼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곳에 앉아 바깥을 보고 있으면 창밖 너머 구름이며 소나무 숲이 생생하게 보여요. 멍한 채로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내가 정말 과분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죠. 안마 의자도 없고,테이블도 크지 않지만 책 한 권 올려 둘 수 있으면 충분해요. 잠시 쉬는 거지, 아예 드러누워 자는 공간이 아니잖아요. 이 정도면 돼요.”
---「도예가 김정옥의 미리내 집: 오늘도 나를 지키며 우아하게 산다」중에서
마당 있는 집은 그에게 계속해서 요구 사항을 내 놓았다. 꽤 오래 집주인의 관심을 받지 못한 집은 한동안 그의 아침 글쓰기도, 주말 서점 나들이도 방해했다. 직접 목수 일도 칠도 미장도 하느라, 웃자란 잡초를 솎아 내느라 도무지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곧 원래 생활로 돌아가리라 생각했으나, 결국 “집은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삶에 개입하는 인격적인 존재”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산마루의 호젓한 주택으로 말미암아 그의 생활 자체가 달라졌음을 받아들였다. “계단 난간의 촉감에서, 조금 낮게 걸린 욕실 세면대의 높이에서, 뒷마당 느티나무 그늘에서” 그는 20여 년 전 이 집을 짓고 산 이의 흔적을 헤아렸다. “집은 사소한 것들의 고고학”이며, “집은 내가 한참 뒤에 내가 모르는 어떤 이에게 전해질 편지 같은 것”이라고 《사물의 뒷모습》에도 썼다.
---「미술가 안규철의 산마루 집: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중에서
산자락 한편이 고스란히 나의 정원과 숲이 되는 풍경. 산언덕 곳곳에는 벚나무, 물박달나무, 계수나무, 소나무가 가득하고 계절마다 산수유와 진달래, 작약이 피고 진다. 그 너른 자연의 품에 크고 작은 건축물 네 채가 들어서 있다. 한 채는 침실과 주방, 욕실을 중심으로 한 공간이고, 다른 한 채는 서양화가이자 설치 미술가이며 최욱 대표의 아내인 지니 서의 작업실이다. 하이라이트는 나머지 두 채.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노년에 살던 네 평 크기의 오두막보다도 작은 공간으로 한 곳은 지니 서를 위한 ‘명상의 방’이고, 다른 한 곳은 최욱 대표의 ‘사랑방’이다. 지니 서가 남편에게 선물로 받은 명상의 방은 철판과 나무로 마감한 삼각형 집. 내부에는 그녀가 디자인한 책상 한 개만 놓았을 뿐 다른 집기는 일절 두지 않았다. “작품 스케치를 하거나 책을 읽고 싶을 때 이곳에 올라오는데, 내려갈 때는 가져온 물건을 다 가지고 가요. 비웠을 때 더 아름다운 집이거든요. 높은 곳에 자리해 해가 뜨고 질 때도 정말 예뻐요.”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학고재 갤러리와 두가헌, 백남준기념관 등을 통해 극강의 미감을 보여 준 최욱 대표 역시 자신의 사랑방을 가장 좋아하는 공간으로 꼽았다. “한국에는 정자(亭子) 문화가 있잖아요. 색다른 시간과 풍경이 흐르는. 이곳이 제겐 정자 같은 곳이에요.”
---「건축가 최욱·설치 미술가 지니 서 부부의 부암동 집」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