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움과 고통은 극복하고 나면 항상 그 너머에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고, 저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기에 행복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습니다.
---「22~23쪽 ‘안토니 블룸 대주교와 한 인터뷰’」중에서
주님을 볼 욕심으로 창공을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보아도 소용이 없지요. 오히려 이웃을 자세히 쳐다보아야 하고, 그 이웃을 위해 하느님께서 죽으실 정도의 가치가 그들 각자에게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29쪽 ‘안토니 블룸 대주교와 한 인터뷰’」중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건 사자 굴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취미가 아니라, 정말 생사를 걸고 그분을 찾아야 하지요.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많이 쌓았다 해도 그분을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을 알려면 인생을 걸고 뛰어들어야 합니다.
---「34쪽 ‘안토니 블룸 대주교와 한 인터뷰’」중에서
우리는 그분께 무엇인가 받기를 원하지, 그분 자체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관계일까요? 친구 관계에서도 무엇인가 받을 생각만 하고 친구에게는 관심이 없다면 그 친구와 나누는 우정을 참된 우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친구가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될지 신경 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친구 자체를 사랑합니까? 주님과 맺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58쪽 ‘하느님의 부재’」중에서
지금까지 말한 것에 동의한다면 문을 두드려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이 대두됩니다. 우리가 두드려야 할 문이 어느 교회의 문이라면 그저 가서 두드리면 됩니다. 그러나 어디를 두드려야 할지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기도하기를 원하면서도 대부분 “어디를 향해서 기도해야 할까? 내 눈과 마음을 어디로 향하게 해야 할까?”라고 자문합니다.
---「82쪽 ‘문을 두드림’」중에서
러시아의 우주 비행사 가가린이 우주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창공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없었노라고 했을 때 모스크바에 있는 어떤 신부님이 “땅에서 그분을 만나지 못했으면 하늘에서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평한 적이 있습니다. 제 말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느낄 수 없다면, 비록 그분을 만난다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86쪽 ‘문을 두드림’」중에서
힘은 하느님께서 주시지만, 그걸 쓰는 것은 우리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어떤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청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일을 하기에 너무나 약하니까 대신 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115쪽 ‘내면으로 들어가기’」중에서
죽음의 위험이 다가오는 그때, 그는 혼자였습니다. 자신은 너무나 작은 존재였으며, 그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음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나 신경을 계속 외는 대신 예리코의 눈먼 이처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131쪽 ‘내면으로 들어가기’」중에서
첫째로 할 일이 없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습을 해 보십시오. 가만히 앉아서 “자! 아무것도 하지 말자. 5분 동안만 가만히 있자.” 하고 말하면서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그러고 나서 그동안 계속 ‘나는 여기 하느님의 현존 안에, 나 자신과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가구들의 현존 안에 있다. 자! 가만히, 움직이지 말고 있자.’ 하고 생각하십시오. 아마 처음에는 1분이나 2분 정도만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147쪽 ‘시간 활용하기’」중에서
말을 할 수 있으면 우리 주위의 모든 풍랑을 하느님께 가져갈 수 있습니다. 침묵 안에 머무르면 이런 폭풍 속에서도 하느님께 눈을 돌리고 옆에서 파도가 치도록 내버려 두면서 평온한 상태로 쉴 수 있습니다. 물론 완전히 평온한 상태라 해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그때가 모든 다툼과 긴장이 하느님의 손안에 바쳐지는 때입니다.
---「155~156쪽 ‘시간 활용하기’」중에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무언가 조심스럽고, 멀고, 차가운 관계가 계속되고 예식적인 말과 행동을 해야만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절차 없이 하느님을 1인칭과 2인칭으로, 곧 진정으로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때가 옵니다.
---「169쪽 ‘하느님께 말씀드리기’」중에서
하느님을 찾는 과정에서 고통과 불안, 희망과 기대 등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겪으며 견뎌 왔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뵙기를 원하는 그분이셨고, 또 우리를 괴롭히는 분이셨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갈망하는 분이시며, 우리를 피하시는 것 같기에 원망스럽기도 한 분이셨겠지요. 그분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분인데도 우리에게 응답이 없으신 분이셨을 것입니다.
---「176쪽 ‘하느님께 말씀드리기’」중에서
성모님은 단순히 하느님이 사람이 되기 위해 사용된 도구가 아닙니다. 그분은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하셨고,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여 그분의 뜻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겸손했기에 하느님이 그분에게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184쪽 ‘두 가지 묵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