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다고 길이 생기진 않아요.”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길이 없다는 걸 기어코 확인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후회할 줄 알면서도 그 후회가 빗나가기만을 바라며 해야 하는 일이었다. --- p.16 「나잇값」 중에서
“저기……” 내가 노려보자 그는 놀라며 물러섰다. “몇 번 불렀는데 답이 없으셔서……” 조금 전 그가 잡아당긴 티셔츠의 팔꿈치 부분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근데 내가 티셔츠를 언제 갈아입었더라. “왜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왜요.” “……얼굴에 복이 많으셔서……” 기가 막혔다. “그래서 복 좀 달라는 거예요?” (…)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드디어 미쳤구나 싶으면서도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이야기나 들어 볼까 싶었다. 내 얼굴의 복은 차치하고,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건지, 도통 맞지 않는 일 같은데 도망치지 않는 이유가 뭔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그늘에 들어설 생각은 왜 못 하는 건지 궁금했다. --- p.32 「복이 참 많으세요」 중에서
몇 분 지나지 않아 주인이 다가왔다. 커트 머리에 줄무늬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여자였다. 특별히 꾸민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온몸으로 ‘난 매력적인 사람이에요’ 기운을 뿜는 사람. 기어코 아이라인을 그리고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구두까지 챙겨 신고 온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언제부턴가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괴로워하곤 했으니까. 종종 누군가를 따라 해 보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더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활짝 웃는 그녀 앞에서 괜히 왔다는 후회가 다시 한번 밀려들었다. --- p.71 「망생의 밤」 중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챙겨 보시는 건가 싶었는데 유튜브라니. 놀라운 한편 절망스럽기도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귤 할머니는 주섬주섬 스마트폰을 꺼냈다. 당장 내 눈 앞에서 영상을 틀 기세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일 년에 걸쳐 사라진 공황이 이때다 싶어 돌아올 것 같았다. 망할 놈의 유튜브. 세상은 분명 유튜브 때문에 망할 거다. --- p.114 「귤 따는 춤」 중에서
오후 세 시, 사람들이 졸음과 싸워 가며 부지런히 움직일 시간, 나는 침대 위에 누웠다. 다용도실 옆에 붙어 있는 내 방은 집에서 가장 해가 들지 않았으므로 커튼을 치지 않아도 어둑했다. --- p.125 「뽑기의 달인」 중에서
“원하는 게 있으면 그냥 말하라고. 돌리지 말고, 이유를 설명하려 들지도 말고, 그냥 내가 원한다 뱉으라고. 가끔은 도저히 안 들어줄 것 같은 일도 들어주곤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