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린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집 주소를 노출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인스타그램 해시태그와 팬들의 댓글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실에 있는 유명 브랜드 아파트. 동호수까지야 알 수 없었지만 그걸로 족했다. 대단지가 아니라 돌아다니다 보면 금세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 마음속 한편에는 정말 만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 차라리 못 만나면 좋겠다. 집 앞까지 찾아가는 주제에 무슨 말이냐 싶지만, 진짜로 수린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민영은 동네 구경 온 사람처럼 아파트 단지 안을 어슬렁거렸다. 새로 지은 아파트라서일까. 단지 안이 마치 공원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걷다 보니 산책을 나온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 p.18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여자는 남자의 비밀에 대해 함구하게 되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말한다고 해서 믿어줄 만한 얘기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여자가 같은 인턴인 남자의 평판에 흠집을 내려고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지어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면 정신과를 찾아가보라고 등을 떠밀지도 모른다. 여자의 생각은 더욱 확장되어, 어쩌면 이 회사 내부에 남자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 존재해 서로의 비밀을 지켜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나아갔다. 여자에게는 그들의 비밀을 폭로할 용기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자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인간들이 있었던 것이 납득이 갔다. 다만 그런 인간들이 여자가 앞으로 살아갈 세계에서는 부디 소수이기를, 여자는 순수하게 바랐다.
남자는 비밀을 지킨 대가를 여자에게 주었다. 시작은 남자가 마련한 인턴들의 저녁 모임에서였다.
--- p.64~65
1년 전, 작은 기업이지만 취업에 성공했을 때 취준생 딱지를 뗐다는 기쁨으로 날아갈 것만 같았는데 다시 돌아올 줄 몰랐다. 애꿎은 문자 기록을 뒤적거리며 사장이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를 몇 번이고 읽는다. 살면서 가장 많이 읽은 단문이 아닐까. ‘상황이 좋지 않은 탓에 불가피하게 결정된 사항이고 우리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나쁜 마음은 먹지 말길, 건승하고 다음에 밥이라도 먹자.’ 해고를 명확히 알리는 이 문자는 해고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 참 많이도 빙빙 돌려졌다. 또한 어디에도 미안하다는 말이 없다. 사장이 문자를 타이핑할 때 속내를 빙빙 돌리기 위해 투자했던 노력을 상상해본다. 그 과정으로 사과를 대신한다. 한 번도 받은 적 없는 사과지만, 그가 이 정도로 노력했다는 사실만으로 사과를 받은 셈 치는 거다. 이 배려는 수요 없는 공급이다. 그의 마음을 필사적으로 대변하면 할수록 어째서인지 가슴이 시큰해진다.
--- p.85
[얘기 좀 하시죠.]
주말에는 남자가 찾아왔다. 조가 와인 병따개를 찾고 있었을 때였다. 10월 7일 자, 우주 지능체가 지구를 지나친 바로 그 날짜의 데이터 검토를 마치고 그 놀라운 결과를 자축하려고 와인과 치즈를 주문해둔 주말이었다. 이전 날짜의 전파 강도는 3에서 4 정도로 그렇게 세지도, 지속적이거나 반복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10월 7일, 지구에서 가장 가까웠던 그날 갑자기 전파 강도가 평상시의 30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주파수도 1천 420기가헤르츠에 가까웠다. 천문학자들이 외계인이 통신해올 때 선호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로 그 주파수였다. 위층 남자는 이 감격의 순간을 깬 것도 모자라 문을 똑똑, 두 번 더 두드렸다. 분위기가 깨져 기분이 꺾인 데다 위층 남자의 풍채가 좋아 보여 더 언짢아졌다. 조는 어깨가 넓어 보이는 티셔츠로 갈아입고 문을 열었다.
“무슨…….”
기어들어가려는 목소리에 힘을 더 줘보려 괜한 어깨에 힘을 들였다.
--- p.144~145
여전히 붕 뜬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니 손님이 있었어. 아빠의 집에 손님이라니, 처음 있는 일이었지. 중년의 아주머니였어.
그녀는 나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어. 하지만 그 미소는 아주, 아주 지쳐 보였어.
안녕, 나도 로봇이란다. 박사님이 날 만들어주셨지.
아빠가 만든 다른 로봇을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었어. 자세히 보니, 옛날에 만들어져서인지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의 정교한 모델은 아니었어. 그렇지만 그녀의 미소는 보는 이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지.
박사님이 그러는데 너도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나도 로봇이면서 처음 마주하는 다른 로봇이 신기했다면 웃기게 들릴까.
나도 감정을 느낄 수 있단다. 감정을 느끼는 건 피곤한 일이 지. 그렇지 않니? 아주머니가 말했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저는 좋아요, 이렇게 대답하자 아주머니는 나를 오랫동안 바라봤지.
--- p.191~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