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석과 나는 열흘 차이로 태어났지만 할머니는 영석의 태몽만 꿨다. 꿈에서 앞마당에 나갔는데 나무에서 알이 굵은 대추가 우수수 떨어져 치마폭을 벌려 대추를 한가득 받았다고, 그게 영석의 태몽이라고 했다. 내 태몽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아니면 대추가 여러 알이니 그중에 하나는 나일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할머니를 붙들고 떼를 쓰듯 물어본 적이 있다. 할머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추는 아들이다. 이건 석이가 나중에 큰 인물 된다는 꿈이야.”
할머니는 늘 그렇게 좋은 건 죄다 영석의 앞에 갖다 붙였다. --- p.20, 「대추」
엄마는 내가 공부를 덜 해서, 고소득 전문직이 못 된 탓이라고 했고, 큰엄마는 내가 공부를 너무 한 게 문제라고 했다. 심지어 공의 엄마는 내가 친정에서 제대로 못 배우고 자라 이 모양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의 말이 모두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일일이 바로잡기는 어려웠다. 큰엄마 안금자, 친엄마 정은주, 공의 엄마 윤혜숙까지 세 엄마의 삶과 부딪치면서 지금의 내가 되었고, 나는 그저 그들과는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을 뿐이다. --- p.72, 「안(安)」
남자는 안기부에서 일한 적이 있는 고위 관료라고 들었다. 부친은 과거의 독재자는 지금까지 옹호하면서도 그 부하의 첩이 된 이경자는 경멸했다.
모친의 생각은 달랐다. 모친은 이경자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만큼 고맙다고 했다. --- p.80, 「경자」
“너를 보면서 다시 아이를 기르고 싶다고 생각했어. 내가 아이를 원한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어.”
연주는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말투만은 결연했다. 나는 그 말을 연주가 다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싶다는 말로 이해했다.
“연주야, 그러면 너 누구 한번 만나 볼 생각이 있는 거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실은 찬형 씨 선배 중에 괜찮은 사람이 하나 있어. 예전부터 너한테 소개해 주고 싶다고 찬형 씨가 여러 번 말했는데 내가 너 남자 만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고…….”
“아니, 남자는 필요 없어. 나는 그저 내 아이를 낳고 싶어.” --- p.125, 「연주의 절반」
아기는 또 엄마 젖을 제대로 물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맞은편에 앉은 산모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눈인사를 했다. 새벽 3시에 눈썹이 반쯤 날아간 채 기미와 다크서클이 얼굴에 가득한 여자 둘이 가슴을 드러내 놓고 마주 앉아 있는 이곳이 천국일 리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 p.140, 「조리원 천국」
“팀장님, 저는 제 일이 전화로 사무를 보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사무적이라고 지적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승주는 초라한 평점표를 보고도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따지듯 물었다. 미연은 승주를 차분하게 타이르려 애썼다.
“승주 씨, 나는 승주 씨가 단순히 사무를 보는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 p.161, 「돌보는 마음」
“네가 거저 줘도 갖지 않겠다고 한 B 아파트가 지금 10억이 됐어. 하루아침에 벼락 거지가 된 기분이라고.”
상우가 정윤에게 원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10억?”
정윤이 벌떡 일어나 되물었다. 그 집이 10억이라고? 녹물이 나오고 베란다 새시가 덜컹거리던 그 집이? 그러니까 지금 혜미가 사는 그 아파트가? --- p.207~208, 「내 이웃과의 거리」
그곳을 둘러보는 분례의 표정이 착잡했다.
“마지막 순간을 편안히 보내실 수 있도록 최대한 아늑하고 편리하게 꾸며 놓았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어요.”
흰옷을 입은 여자가 친절한 미소를 띠며 마지막 순간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평소라면 잘 들리지 않을 소리였는데, 오늘따라 선명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 p.222~223, 「입원」
텔레비전 뉴스에서 봤던 우한 지역의 영상이 떠올랐다. 기차역 앞을 막아선 군인들과 적막한 도시의 살풍경한 모습을 뉴스로 볼 때만 해도 이웃 나라에 닥친 재앙이라고만 여겼다. 상희는 청도가 봉쇄될 일은 없을 거라고 아이를 안심시켰지만, 앞으로 예상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일남은 생각했다. 아니, 이미 일남은 처절하게 버려지고 고립된 기분이었다. 일남은 한 팔로 무릎 위에 올려진 부친의 유골함을 세게 끌어안았고, 나머지 팔로는 곤하게 잠든 가영의 어깨를 감쌌다._261, 「특별재난지역」
“아가씨네 신혼은 신혼 맞나 봐요.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 좋네요.”
희숙이 괜한 너스레를 떨며 어색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언니. 잘 살게요. 언니와 오빠처럼요.”
명주가 희숙의 손을 지그시 잡으며 말했다.
“네, 그래요, 아가씨. 행복하게 살아요.”
나는 오빠와 이제 그만 살 거예요, 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 p.279, 「태풍주의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