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이 미군정기의 여성들이 어떻게 관습과 구제도로부터 벗어나 여성해방과 남녀평등의 삶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는지, 어느 시점부터 통일운동으로 전환되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또한 제주 4·3 때 여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해 싸우다 시대의 희생자가 된 김진언 할머니를 비롯한 모든 여성들의 발자취를 이곳에 깊이 새긴다.
---「들어가며」중에서
그때 우리 부락에서 부녀회를 만들었는데, 조직이 셌다. 동네 여자가 죽으면 행상을 메어서 공동묘지까지는 못 가도 신작로 길 건너까지는 여자들이 다 옮겼다. 사촌고모님이 부인회 회장이고 우리 어머님은 부회장, 나는 총무를 맡았다. 어머니, 사촌고모, 내가 옆구리 딱 해서 나서기 시작하면 남자들이 아무 소리도 못했다. 고모님이 일하다 비위가 틀어져서 베구들동산에 가 “이 쫄장부 같은 놈들 다나와라” 하면 남자들이 발발 떨며 맥을 못 추었다.
---「1946년 가을」중에서
해안 마을(북촌리, 조천리, 신촌리)에 자리 잡았을 때는 입말로 어떻게 일을 할지 의논했다. 어떻게 해야 이놈들한테 잡히지 않을까, 이놈들이 들이닥치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이런 논의를 모두 입말로 했지 글로 적지 않았다. 같이 의논한 내용을 위원장이 적어 글로 지시를 내려야 하는데, 우리는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직접 당원들을 쫓아다니며 지도했던 것이다. 내가 감옥에 가서 머리를 싸고 책이라도 본 것이 그런 이유였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고 어렵게 활동해야 했던 것이 아닌가 해서.
---「1947년의 변화들」중에서
경찰서에서 한 달을 시달리다 6월 초하룻날에 헌병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젠 안심이구나 하고 숨을 돌리는데 헌병이 서류를 한 뭉치 갖고 들어왔다. 서류가 책 두께만 했다. 김진언이가 당원 40명을 흡수시키고, 쌀 40가마니, 갈치 열두 짝을 산에 올렸다고 다른 사람이 다 불었으니 서류에 지장을 찍으라고 들이밀었다.
“아니, 당신네도 생각해봐라. 촌에 사는 가정부인이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할 수 있겠나. 일본에서 살다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사람들 따라 고리짝 지고 산에 올랐다가 이지경이 된 거지. 난 당원이 무언지도 모른다. 당원이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우꽈(사람입니까)?”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장작으로 또 허리를 내리쳤다. 까무러치면 물 가져와 치대며 깨우고 다시 몽둥이질을 해댔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지장 찍는 것을 거부했다.
---「체포와 고문」중에서
미군 비행기가 뜨기 전에 이동한다고 부리나케 가는데 황해도 개천벌판에서 기습사격을 당했다. 아침 6시부터 하늘이 새카맣게 낙하산이 떨어졌다. 총알이 콩알 쏟아지듯 퍼부을 때는 아예 가만히 섰다. 같이 일하던 처녀와 부둥켜안고 있는데 총알이 처녀 턱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 새파란 처녀보다 내가 맞아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턱이 떨어져나간 얼굴을 수건으로 덮어주고 계속 걸었다. 무거운 양식을 지고 뒤쳐져 나무 그늘에서 숨 고르고 있으면 총알이 두 다리 사이로 날아와 박혔다. 남정네들이란 먹을 때는 달려들지만 긴 행군에 무거운 짐 하나 같이 지려 하지 않아 부아도 나고 해서 일부러 뒤쳐져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북한, 무계급사회의 계급」중에서
징역살이 하는 500명 여자들은 못하는 게 없었다. 뭐라도 해내라고 하면 다 해냈으니까. 의무과에 문제가 있어 함께 단식투쟁을 하려 할 때였다. “의무과에서는 어떻게 아프면 맨날 아스피린만 준다. 감기약 주라고 하면 다른 걸 준다” 이렇게 말하면 절도나 강도로 아편을 해서 들어온 사람도 약에 대해서 불만이 많으니까 동조했다. 그래도 500명이 한입으로 “의무과에 불만이 있어서”라고 하며 단식을 하기까지는 3년이 걸렸다. 일광욕에 가서 담당자 눈을 피해 공작해야지, 공작하라고 책임지운 사람도 돌봐야지, 항상 마음이 겁나는 생활이었다. 한번은 같이 영화 보는 시간에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암호로 된 글을 쓰다가깜박 졸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꿈속에 나타났다.
---「다시 교도소에서」중에서
교도소에서는 제일 많이 죽는 이유가 혈압이다. 혈압은 즐거워도 슬퍼도 안 되고, 추워도 더워도 안 된다. 그러다간 몸서리난다. 한번은 우리 방에서 밥 먹는 어른이 나 앞에 서 있다가 콕 쓰러지니 그대로 끝이었다. 밤에 자다가도 혈압에 죽었다고 하면 내가 나가서 수습해야 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몸이 길어지는지 들어올 때 입고 온 치마를 입히면 짧았다. 여사에서 죽은 사람은 내 손으로 묶고 관에 들여놔서 못을 박았다.
그때 울지 않고는 박을 수가 없다. 금방 들어온 놈이 죽으면 청의를 벗기고 영창에서 제 입던 옷을 찾아다가 입혀주는데, 우리 같이 징역을 오래 산 사람은 그냥 청의를 입힌다. 그걸 관 안으로 넣을 때는 눈이 캄캄해진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나도 언젠가 이럴 것인데 그땐 누구 손으로 해줄 것이냐 싶어서 관에 못질하고 방에 오면 한바탕 울게 된다. 만 24년 동안 시체를 150명은 묶어봤다.
---「전향이 남긴 것」중에서
만약 내가 한국전쟁 때 형무소에서 나와 바로 제주로 왔다면 집안에서도 못 견디고 나를 죽여버렸을 거다. 우리가 한 일 전체가 거짓말이 돼버렸으니까. 사람만 죽었지 뭐 하나 이룬 것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 부락으로 돌아오기도 창피했다. 하지만 그때 분들이 몇 명 없으니까, 있어도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어른들이라 그렇지 그 사람들 보기가 여전히 너무 미안했다. 우리가 어리석어 그 고생을 한 것일까, 아직도 모르겠다.
---「내 소원은 일부일처제」중에서
그때는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가 여성운동을 하는 것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여성해방 없이 인간해방은 없는 건데, 봉건의식이죠. 그때는 자기 남편 하는 일을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았고, 남편도 자기 부인이 활동하는 걸 소문낼까 두려워해요.
---「임실군의 해방 풍경」중에서
김진언 할머니와 5년여를 만나면서 탁월한 능력과 품성을 가진 한 여성이 역사의 투망에 갇혀 고적한 말년을 보내는 모습을 보았다. 밥을 많이 한 날은 혹시 누가 오지 않으려나 기대하게 된다고 하시던, 사람을 반기고 극진히 대접하는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분들이 이루고자 했던 좋은 세상도 그 속에 있지 않았을까. 할머니의 집밥을 셀 수 없이 먹으며 들었던 한 여성운동가의 꿈과 좌절을 후세에 전하고 싶었다.
---「작가의 말」중에서